2001 법무사 8월호

8 • 4 자 동아일보게재의 엉 • 1운동 의 읽을 거리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내용이었다. 3 • 1운동의 역사를 왜곡해도 정도가 지나친 상식 이하의 내용이었다. 일본 역사 왜곡 사건을 규탄하는 성난 소리 가 온 천지 를 전동하는 요즘 우리 나라 식자가 우리 나라의 역사를 왜곡하는 사실을 볼 때 참으로 개탄함을 넘어 분노의 마음 억제 할 길 없다. 8 • 15해방후 첫 3 • 1절기념행사때북한공 산 정권은 "3 • 1운동이 실패8t섯은 자본가 부 르조아계급인 33인이 지도했기 때문이고 공산 당이 영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핏대를 올리 면서 3 • 1운동의 위대 성을 깎아 내렸다. 이에 대해 산석구목사(1950.10.10 북한평양 형무소에서 복역 중 총살 순국~ 19 46. 3.1 저녁7시 평양중앙방송국에서 3 • 1절 기념 방 송시(생빙송공산 당국이 제공한 원고를 무시 하고 "3 • 1운동 당시에 우리나러에는 공산당 이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1917년 소련 10월 혁 명직후라소수파와다수파가피비린내 나는해 게모니 쟁탈전 중이었음) 노동자와 농민은 조 직적으로독립운동을 일으킬 조직체를갖지못 하였음을지적하고북한당국의 이와같은주 장은3 • 1운동의 위대성을모독하는것이며 주 객 이 전도되는 주정이 라고 통박하는 바람에 방 송10분민에 중단되어 북조선중앙 정치보위부 에구금되는사건까지 있었다. 신복룡교수의 임을거리’는 내용의 흐름을 볼 ..P 때 해방 직후 북한 당국의 3 • 1운동의 역사관과 무엇인가 일맥상통하는 점이 엿보인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로니칼 합을 금할 수 없다. 3 • 1운동을 실패한 것으로 보는층은 3 • 1 운동이 즉각적인 독립의 성취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신석구 목사는 자서전에서 ‘나는 지금 독립 을 거두려 함이 아니요 독립을 심으러 들어 가 노라. 만일 내가 국가 독립을 위히여 죽으면 나의 동포 마음속에 민족정신을 심을 것이다.’’ 라고하였다. 김 진봉 충북대 교수도 ‘‘만세 시 위를 즉각적 인 독립의 쟁취보다는 항일운동의 씨를 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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