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법무사 6월호

(]) 6 • 25 사변과 나 1950년 6월 25일 새 벽에 북한 공산집단은 전쟁 을 일으겨 불법으로납침을감행한것이다. 이것 이 한반도를 휩쓸고간 피 비린내나는 4년간의 동 족상잔의슬픈전쟁사이다. 그때내 나이만18세, 고향 영진 신덩중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였댜 파축지세로 밀고 들어온 공산군은 불과 1주일 토 못되어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건너서 계속 납하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탕횡한 우리 정 부는 일시적으로 대전으로 임시정부를 옮겼다가 그곳에서도더 버티지못하고부산으로완전히 이 동하계 되었다. 승승장구, 기세당당하던 공산군 은고 여세를몰고 호남쪽은물론 영납의 젖줄기 낙동강까지 밀어 부치더니 거기에서 아군의 최후 저지선에 걸려 많은인명피해를 입고고전을하다 가다시 진로를바꾸어 대구근교인 칠곡군 가삼면 다부동 쪽으로 해서 대구를공략하려다가 이마저 도실메로돌아갔다. 그들은다시 영천,신령, 화산을거쳐서 영천과 포항을 장악하여 대구를 우회적으로 공략할려고 했는데 고 곳화산전투에서도 유엔군과맞부딪쳐 서 처절한전투끝에막대한 인명피해를 입고그 들의 예봉은 완전히 꺾 이기 시작했다. 이와같은상황에서 갑작스레 밀려 내러오는수 많은 피 난민들의 아비규환 속에 나는 근심과 걱 정 으로 나날을보내고 있었다. 우리가족들도피난가기로수의가되였으나, 하 루는 친구들도 만나보고소식도 들으겹 학교에 갔 더니, 냐와같은생각을 가진 여러 학생들이 나와 서 옹성거리고있었다. 그때마침김영조교감선 생이 나다나더니 우리들을모아놓고 일장훈시를 ■■■■■■ 했다. 고 골자는 지금 북한 공산군이 처들어와서 국가가 누란(累卯)의 위기에 처하고 있으니 조국 을구하기 위해서는여러 학생들이용검하게 나서 서 펜을 총칼로 대신하여 구국의 길로 나서라는 것이댜 그 말을듣고 나이어린 우리들로서는상 황을정확히 판단할수가 없어서 망설이고있었는 데 몇몇 학생들이 수의 끝에 군에 가겠다고 지 원 하는 바랍에 고세서 야너 도나도 하면서 고날 학교 에 온 학생둘은 모두가 가기를 희망했다. 일종의 "영웅심 의 발로” 라고나 할까? 1950년 8월 7일 고때 내 나이 만 17세 10개월 앳민소넌에불과했다. (2) 소년학도 지 원병 沙年學徒志願兵) 다음날 오전 10시까지 군입대 준비를 해 가지 고 학교에 집합하라는 것이다. 고날 집에 돌아와 서 이와같은내뜻과학교에서 있었던 일을부모 님께 이야기했더니 아머지께서는 슬픈표정을지 으시며 꼭 가겠느냐고 반문하시고는 고날따라 모 두같은방에서하루를지내자고했다. 지금생각 하면 저 어린것이 이제가면필시 불귀의 몸이 되 지나않을까하는원념에서 하선부모로서의 깊은 속정을들어낸것같다. 다음날아침밥을먹고집을떠나던순간부모님 은 집 밖 멀리까지 따라나서면서 그때야 눈물을 지우시고손을흔들면서 내가 멀리 떠날때까지 목 송(目 送)으로 전송을 하였다. 1950년 8월 8일 유난히도 무더운 여름 날씨 속 에서 학교에 모이고 있으니 곧, 군용트럭 한 대와 현역군인 두사람이 와서 우리 지원병을몽땅신 고서는 영천으로 떠났다. 그곳 영 천지 구에 모인 다른 학생들과 합류하여 행군으로 영천 금호 초동학교에 다달아 여기에서 1박을한 후에 대구계성층학교로 이동을 하여 이 대만법무사엽외 51 I

RkJQdWJsaXNoZXIy ODExNj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