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 행군대열에서 이달하지 않고 끝까지 버디면 서 살아남계 되 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기 적같은 일이다. 그때의 내 강인한정신력과지철줄모르는 인내심이오늘날고것이 내 생애에삶의 원동력이 되었다고해도과언이아닌것같다. (5) 정규군征規軍)으로재편 이렇게히여 고생 끝에 살아납은장병과 이미 소 모된(전사자와 행방불명자) 인원을 보충 받아서 대 한민국의 정규육군으로 다시 대어났다. 그때가 1951년 1월 중순경으로 기 억되다. 부대명칭 육군 제1경비대대 소속 육군본부직할대 계급 육군일등병 군번 0713(Jl0 정규 군복과 군화, 양말, 수통 배낭, 모포 Ml소 총, 탄띠실탄, 수류탄 등이 지급되었고 지휘관은 모두현역 군인으로대체되었다. 조대부대장은박 주용육군소령이였다. 부대가 재편되자 터 쉴 틈새도 없이 또 이동하기 시작했댜 우리 어린 전우들은다시 사지로 떠나는 가 보다고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부대장의 훈시를 통하여 지금부터 여러 장병들의 임무는 후방으로 이동하여 "첫째 지리산을 비롯하여 전납북도와 경남지대 에서 준동셸젊動)하고 있는 적의 빨지산을 섭멸하는 것이주된목적이고, “둘째 우리군의 종요한 군사시설과 UN군의 보 급기지 등을경비하는것이 또한그 임무라고하였 다. 일단은반가운소식이었댜 전 부대가 완전무장을 하고 행군대열을 갖추어 도보로 울진에서 불영계곡과 경북춘양과 서벽을 거쳐서 황지와 도계 에 이르렀다. 이곳에 먼저 와서 머물고 있던 적의 대병 력과 만나 야간에 백병전이 ■■■■■■ 벌어지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피아간에 많은 사상자가 났다. 전투는 일단 끝났으 나 고 후유증이 심한 가운데 우리 부대는 경북봉화 까지 이동을 하계 된 것이다. 고곳 역에 이미 대기 하고 있던 군용화물치에 분승하여 어두움을 뒤로 한 재 영주를 거쳐 중앙선따라 안동, 영천, 대구, 대 전, 이리를경유하여 전라북도군산까지 갔다. 내 정돈땅고향과모교가 있는영천신령역을통 과할때는 왠지 가슴이 실레이고 부모형 세와 친구 들의 안부가 그리워서 견딜수가 없었다. 만약에 내가 오대산과 발왕산 전투에서 축었더라 민지금과같이 고향산전을다시 볼수가 없거니와 한낮 무명용사로서 군적(軍籍)에도 등재되지 못하 고 개 축음만 했을 것이 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 이 확쏟아졌다. 그때 같이 종군한수많은 어린 학도 병중에 애석하게 산화한한맺힌 원혼들이고 일마 이며 지금도 이 강토 어느곳에서 외로이 잠들고 있 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들의 영혼이라도 국군묘지 세1번지에모서두고 위령제라도한번올려주었으면 하는것이 우리 모두의 간절한소망이기도하다. (6) 공바토벌(共廉討伐) 일차이동 목적지는 전북 군산시 월명동에 있는 군산시 립공희당이었다. 그곳이 부대본부였으며 2 개중대썩 번갈아 가면서 그중 일부는 군산비행장 괴 항만에 있는 미군보급물자경비에 임하였댜 고리고 나머지 2개중대는 전북 정읍군 산내면과 칠보면에 각 주둔하면서 그로부터 그 일대에 준동 하고 있는 공비 소팅에 나셨다. 내가 소속한 우리 浜和대가 주둔한 곳은 칠보면 시산리에 있는어느적색분자소유의 빈집이였댜 처음도착한그곳상황은하도기가막혀 여기에서 잠시 살펴본다면 우리가 도착하자 민심은 극도로 대만법무사엽외 55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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