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법무사 6월호

수양 I 6 • 25 參戰少年卑走兵手記 흉흉하였고 군과 민의 시각차가 워낙거서 민들은 도무지 우리군을 믿으러고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우리 선배 토벌군인 화랑부대의 위상에 실망하였 기 때문이란다. 화랑부대는 민폐가 많았을 뿐더러 공비토벌에 나설때마다 번번히 실패를 한 관계로 공비의 기세가꺾이지 않고오히려사기만살려놓 아이들이자주출몰하여 민을괴롭히고약탈과살 상과납치를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불안을 느끼고 우리 마저도 불신하는것 같았다. 이와같은민심을파악한우리 선무대원들은주 민들에계 대한민국에서 재 일가는 학도정 예부대라 고 선무공작을 하고 고들의 사기를 복돋우며 우리 학도병을 믿게 하고서는 그 실천의 표본으로 공비 소탕 작전에 임할 때마다 큰 전과를 거두고 고로 인히여 공비들도 민가에는 점근하는 빈도가 줄었 기 때문에 생 업이 차차 안정되고 부터는 우리군을 따르게 된것이다. 그러나 그곳 주민들 가운데는 일분 빨지산의 가 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통하여 우리군의 정보가 누설되고 심지어 공비토벌의 일시와 장소 까지 미 리 알고 있다가 우리군이 출동하게 되면 미 리 매복(埋節해 있다가 일제히 기습해오는바람에 잦은피해와여러번 애를먹은적도있었다. 처음간고곳은 밤이 되면 인민공희국이였고, 낮 에만대한민국세상이였다. 그야말로 전병이 따로 없는 사방이 모두 전방지 대와 다름이 없었다. 우리 부대가 이곳에 온 것은 공비를 소탕하여 민생의 안 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므로 날이 새면 공비가 있 는곳을찾아매일같이출동하였다. 그리고출동을 하계되면상승학도병의 체면을꼭유지하였댜 1952년 늦은 봄으로 기 억된다. 하루는 서납지 구의 유명한 빨치산의 총사령 관이 였던 이현성{李鉉쳅을생포하기 위하여 서남사西 I 56 法務士6월모 南地區戰鬪司令節)에 예속한 우리군의 총연합 작 전이 전개되었다. 그때 내가 속해있던 우리 부대 제2중대도 이 작전에 참전하게 되 었다. 군용트릭 에나누어타고야간출동을하였는데자정이 넘어 도착한곳이 경남하동군소재 덕유산남쪽자락인 것으로 기 억이 난댜 그것에서 잠시 전투장비들을 점검하고 정해진 공격목표 지점인 북덕유산(지금 의 향적봉)정상을 향하여 어둠을 헤치면서 긴징속 에 무사히 팔부능선 고지까지 다달았다. 새 벽 별빛 은 차차흐트러지는 가운데 동년 하늘에는 민동이 트기 시작하자 1600여 고지의 북덕유산 정상에는 적이준동하고 있는그림자가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전투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한판 붙을 참이였다. 이성률 증대장의 공격명령에 따라 지형지물떼! 形iiJ!M;;)을 이용하여 전격한 나머지 적과는 불과 100여미터 퇴는지점에서부터 피아간에 거센총격 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중대장의 통신연락 병 이였던 관계로 고의 명 령에 따라 고가 차고 있는 주노(허 리촘에 차는 지 휘관의 붉은 가방)와 권총을 내가차고증대장은내가메고 있던갈빙소총을바 꾸어 가졌댜 그로 인하여 아니냐 다를까 적은 내 가 지 휘관인줄 알고 나를 향하여 조준사격을 한 것 이 내가 쓰고 있던 철모 오른쪽을 꾀뚫어 일부가 찢어지고 그속에 겹으로쓴화이바 마져도총탄이 스쳐간 탄혼이 납아 있었댜 하마터면 나는 이 전 투에서 또 한번 영결종천泳誌終天)할 뻔했다. 과연 인명은재천이라던가? 마지막 돌격명 령으로 정성에 진격하고 보니 피 아간의 시 신이 즐비하게 홑어져 있었으며 공비들 은 우리군의 저지를 위히여 몇몇 결사대원들이 그 들 발목에 쇠시슬이 동여 묶인재로 결시항전을 한 것이며고틈을타서 적의우두머리 이현상을비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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