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공산군포로수용소 경비업무를 부여받고 고곳 으로 이동하였다. 그때가 1952년 한여름인 것으로 기 억된댜 우리가 고곳에 가기전에 포로들이 폭동 을 일으겨서 한때나마혼란한 가운데 피아간에 사 상자가생겨서 이를진입하는데 애를먹은사실이 있었다. 여기에서 고때 폭동사건의 내용을-다층살펴보 면 그 당시 거 세도에는 수십만명의 중공군과 납녀 인민군포로들이수용되어 있었다.이둘은밤낮을 가리지 않고 UN경비병들이 제네바협정에 따른 정당한 포로의 대우를 외면하고 있다고 하면서 평 소에 거진 항의와 아울러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왔던것이댜 고러던 중 하루는 포로수용소 소장은 Dc:dd 준 장이 그의 몇몇 부하들괴 합께 76포로 수용소 앞 정문에서 고들포로 대표들을상대하여 회담을하 던 중에 때마침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던 포로들에 게 포위되어 포로수용소 소장이 그들에게 포로가 된 것이다. 고로부터 유엔군 측 경 비책 임지들은 이를구출하기 위히여 피아간에 많은사상자를내 고 납치된 지 3일만에야 간산히 구출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거세도 포로수용소의 폭동사 전이며 우리부대는고곳유엔군을지원하기 위하 여간것이다. 우리 부대가 거세도에간 이래 그곳사정이 점자 안정이 되자1952년늦여릅어느날경남통영군소 재 봉암도(일명 추암도)도 다시 이동을 하였다. 그 곳섭에는이미포로수용소가들어 있었으며그주 위에는철조망이 이중삼중으로둘러쌓여 있었다. 우리가 그곳에 먼저가고 거 세도에서 뒤따라온 포 로들은 적색분자중에서도가장 성분이 나쁜 포로 들중왕따들이었다. 우리는이들을 경비하기 위하 여그곳에간것이다. ■■■■■■ 봉암도는 사방러 바다로 에워싸인 자고마한 섭 이며 민간집들도여러재 있었다. 잔잔한겁푸른바 다위에는 때때로 평화로운 갈매기 떼들이 날아들고 간혹고기배들만 오가고 한분조용한 천혜의 아릅 다운섭이였댜 그속에 질서 정연하계쳐놓은 야전 천막속에 포로들은 수용되고 그들은 갇힌자의 신 세이고우리는 가둔자가되어 한지붕한지역에서 다같이 살아가야만 했다. 포로들은그들대로의 지휘계통이확립되어 있어 서 총지휘자의 명 령에 따라 모든 행동은 일사불란 하계움직였다. 아침조회 때가되면동념바다 위에서 붉은태양 이 서서히 떠오를 때를 계기로질서정연하게 대오 를정돈하고있다가총지휘자의 구호에따라각수 용소막시마다 일세히 고들 공회국의 애국가와김 일성 장군의 노래를 그들의 현악기 반주에 맞추어 천지가 꺼지라고 우렁차게 불러댔댜 반복된 그들 혁명가가귓전에 익어 있어서 지금도 기억에서 사 라지지 않고있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자국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자국 오늘도 ... 그들이 이렇게 신나게 부를때면 왠지 우리들은 적개심과 분노가 처올라 큰소리고 야유셔劃隋仰를 보 내기도했다. 그리고 그들세계에서는 업한 군을과 이에 따른 불문법 이 있어서 포로 중에 소위 그들이 말하는 반동분자와반공포로로낙인이 찍힌날에는수용 소 내부에서 비밀리에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축어 서 나오는 것이 상례였다. 죽은 시 신은 토막토막 각을 내 어서 야전동통(드럼통을 반 자른 것)에 집 어넣어 두었다가 이것을 야의에 내다 버릴때에 우 대만법무사엽외 59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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