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 I 6 • 25 參戰少年卑走兵手記 리 감시병의 눈을속이고 교묘히 위장을하여 처 리한것이다. 다같은 인간의 탈을쓰고있으면서 반인륜적이며 부도덕한 악날한 이와 같은 행동앞 에 위는분노의 칼을갈고오금의 치를떨지 않을 수없었댜 (9) 반공포로 석방仮共捕虛 釋放) 1953년 6월말경 한참 무더위가 시작되던 어느 날상부의 명에 의히여 우리 2중대는 인천부평에 자리잡고 있는 반공애국포로 경비임무를 부여받 고 고곳으로 이동하였다. 고 당시 중공군을 비롯 하여 악닐한 극죄(極左) 인민군 포로들은 주로 섭 동지에서 수용되었으나 반공포로들은 대개가 육 지에분산되어 수용되고 있었다. 경북 영천, 경납 마산, 전남 광주, 충남 논산 그리고 이곳 인천 부 평등지이다. 하루는 자정이 넘어 이승만 대통령의 육성이 라디오를 통히여 홀러나왔다. 그 내용인 즉 포로 경 비에 임하고 있는 영용{英勇)한 우리군은 잘듣 고 실천하되 금일 새벽 정각 4시에 유엔경비병들 모르게 비밀리에 반공포로들을 일제히 석빙하라 는것이댜 이말을듣고밤새도록그들석방준비 (이들에게 입힐옷과선발등)를주도 면멸하계마 치고정각 4시에 수용소 정문을 활짝열어새치고 차례대로 조용히 나오도록 유도하였으나 자유가 목메이계 고립던 그들인지라 이성과 감정을 억제 하지 못하고 한꺼번에 몰려나와서는더러는 철조 망을넘고 혹은그 아래로 기어나오면서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유엔군 병사들에계 발각되어 무차 별 총격을 받아모전 목숨들이 아깝게도 죽어간 것이댜 한 인간의 죽음이 이렇게 하여불과 몇분도안 되는순간에 자기자신의 운명을 헤아리지 못하고 비참하계 꺼져 간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I 60 法務士6월모 고 당시 이승먄 대통령과 유엔군간에 반공포로 석 방에 관하여 여 러번 교섭을 하였으나 그들이 들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대통령이 고집스럽계 단독 으로결정한용단이라는것이 알게 되었다. (10) 휴전과 판문접 (休戰과 板門店) 1953넌 7월 27일 드디어 역사적인 휴정협정이 유엔군과 북한 고산군간에 층립국 감시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기토 파주땅판문점에서 조인 식이 이루어지계 된 것이다. 얻는 것이라고는 단 하 나도 없이 잃어 버린 것 뿐이 현실앞에 납북이 아직 토 고착된 상테 에서 그 아픔을 겪고 있는 것이다. 휴전현정이 체결되자고해 8월초부터 월말까지 협 정에 따라쌍방의 포로들이 이 곳 판문점 에서 교 환하계 되었다. 고때 나도당당한대한민국국군의 한 사람으로서 영예스럽게 그곳 경비군이 일원이 되어 파견 근두를 하게 되었다. 처음 도착하여 분 고곳산히들은뿌떻게 뒤집어전포탄자욱과각개 전투호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으며 산은 모두가 민둥승이가 된 재로 아주삭막하였다. 고후내가군에서 만기 재대를하고언젠가한 번 가보고 싶 었던 고곳을 1999 넌 12월 14일 대한법 무사협 회의 주선으로 45년만에 다시 가 볼 수 있었 댜 너무나도변한고곳판문점은격세지감과아울 러 인생의 무상합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민동승이의 산하는 푸른숲으로 뒤덮히고 그 속 에포장된도로는잘정리된가운데 피아간에세워 놓은현대식 고층건물사이에 아담한 회담장이 마 련되어 있어서 그곳에서 남과북이 책상 하나를 사 이에 두고아직까지도 사상과 이념의 싸움을 계속 하고 있다는생각을하니 정덩 가슴이 답답하고말 없이 사라전 전우들의 모습이 떠올라 슬픈상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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