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법무사 7월호

모처럼 작懿리로합성을만터 내던광主 촛불현장을찾았다. 이곳은60여넌전까지만 해도 일제의 통치기관이였던 조선총독부청사와고 리고 경 기도정 등 소위 무소불위권위 인 상징물들이 이 일대를 압도하던 곳이기도 했다. 조선조가 서 기 1394년 풍수지 리학상 명당으로 평 가한 백악泊岳)의 남쪽 한양을 왕도로 정하고 경북 궁을건축한이래 1593년 임진왜란으로폐허가되었 었고 이후200여년간 버려져이었으나 1865년 홍선 군이 새건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 궁궐을 일 인들은 조선총독부청사를 전축하기 위해서 궁궐 일 부를허물고광회문을건춘문옆으로옮기는등우리 들 가슴마디에 전한 자손으로 녹아있던 민족의 상징 물인 경북궁을 역시밖으로 내팽개쳐 버린 것이다. 천인공노할 민비의 시해 역시 이곳에서 있었다. 그 래서 였을까 임진왜란으로겪은고통이 병자호란때 보다깊었고도치명적이였다고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서울의 인구 약 10만명이던 것이 44년이 경과한 병자호란 때까지 10만명 미만으로 오히려 줄고 있었던 사실로서도 당시 일 인들의 잔혹 상을짐작할수 있을것이란것이다. 고려니 그들36 넌의 식민지 정책또한오축했겠는가 I 70 法務士7 월모 실로생존의 보편적 가치마저 용인하지 않은 민족 말살정책이있다고할것이다. 밖으로부터 포위되어 버 린 양심들 고리고 상처의 속살로 그려낸 처참한 몰골들. 고래토 살아남야갸 한다는 기 막힌 사연들을 나는수없이목격했었다. 곡물과문화재의 약탈은물론장정들을 일본군복 으로 갈아입혀서 전쟁터로 내몰고 또 비옥한 경작지 를빼앗고그래서복수의환영에 시달리며만주등지 로강세이주당해야했던한많은우리들, 그런와중 에서도 한쪽으로는 알게 모르게 황민의식에 잠식당 하고있었다. 필자역시 초등학교 입학때 신사를 참배하는자리 에서 잠시 위대한신성에몰입하여 경의로운감격으 로 삶의 가치를 누려봤던 고런 분별없던 경 험을 털 어놓지않을수가없다. 이렇게황민사상에 중독되도록조련되어 가던시 절 도이를거들고 나선우리 선각자(?瓚이 적지 않 았음을안타깝게 생각한댜 물론양심인들성원했겠 는가. 다만생촌의 논리에 휘둘리거나대세의 전운 에 따라 변절과 변신을 번갈아가면서 더욱이 선연한 핏자국을 밝고 비굴한 역시를 연출하지 않을 수 없 었던 천일인사들 고런 고들의 족적은 벌써 밝혀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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