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靜菴趙光캠 先生(1482~1519) (1482) 漢陽(서울)에서 監察元綱의 아들로 出生하였다 字는 孝直0|고 號는 靜庵(정암)이고 本貫온 漢陽이다 일찍 01 性理學을 硏究하여 17~18歲때 아버지 元綱01 魚)||察訪으로 있을때 마침 寒l宣堂 金宏弼先生01 熙川에 流配되어 있을때 자주 찾아가 學問을 배웠다. 이리하여 性理學硏究에 더욱 힘써 金宗直의 學統을 이은 士林派의 領首로서 政治와 敎化의 根本을 밝히고 王道政 治를 力說하였으며 中宗10年(1515) 乙亥에 增廣文科에 及第하여 典籍, 監察을 역임하여 王의 信任을 얻어 司陳院正 言 弘文節廢混 承旨 等을 역임하고 入待할 때마다 儒敎로써 王道政治를 實現해야 한다고 力說하였다 고 후 戶曺, 禮曺으| 正RF을 거쳐 敎理로 經鐘侍讀官 春秋館記注官을 歷任하고 鄕村의 相互扶助를 爲해「呂氏鄕約」을 )저道에 實 施케 하였다 이듬해 副提學이 되어 昭格署의 廢止를 斷行하였다 中宗15年 乙9fX1519)에 大司憲에 승진하여 世子副 賓客을 歷任하였으며 賢良科를 實施하여 新進士類等 3이t의 小壯派를 要職에 安酉t하는 等 勳舊派를 外職으로 몰 아내고 特히 靖國功臣01 너무 많다 하여 削勳을 主張하여 全功臣으| 4分의 3을 削除하는 등 急進的인 改革을 斷行하 여 마침내 勳舊派의 반발을 유발케 되었다 01에 洪景舟 南哀 沈貞 등이 경빈朴氏 등 後官을 움직여 王에게 新進士 類를 設告케 하고 대림 나무잎에 「走肖爲王」이 라는 글자를 써서 벌레가 감아먹게 한 다음 宮女로 하여금 이를 따 다 받치고 趙氏가 王이 되려고 한다는 의십을 조장케 하는 한편 밤에 神武F양을 통해 비밀리에 王을 만나 위협에 가 까운 논조로 趙光祖―派가 党派를 조직하여 朝廷을 문란케 하고 있다고 :巫告하였다 이에 王은 趙光祖의 道學的인 言行에 염증을 느껴 오던 次 마침내 綾jI|ll로 流酉건하였고 勳舊派의 끈질긴 攻擊으로 마침내 1519年 已卯年에 賜死되 었다 이때가 已gp士禍0|다 宣祖元年(1%8年) 戊辰4月에 伸究이 되어 領議政에 追贈하고 光海君2年庚戊 9月에 文廟에 配享되고 ;1號는 文正 公이다 先生은 綾Y1l1I의 竹樹書院에 祭享되었고 著書로는 靜菴集01 있고 已gp士禍岡 남긴 有名한 絶命書는「愛君如愛 父, 憂國如憂家, 天日照丹表, 昭昭臨下士J라 하였으니 그때 나이가 38歲였다. 先生은 當1t의 大學者로서 門下에서 많은 學者가 輩出되었으니 그 代表的인 人物이 成守院(침), 趙릎, 李廷慶, 奇遷 等이다 (4) ~齋 李彦迪 先生(1491 ~1553年) 成宗22年(1491)11月에 慶州良洞게서 生員 李 蕃으| 아들로 出生하였다 初名은 迪이었는데 中宗의 命으로 彦迪으 로 改名 하였다 字는 複古요 號는 贈齋요 ~lj號 紫溪翁) 本貫은 騎5I儒,~11|)이 다 中宗孩年(1514年) 生員으로서 文科에 及第하여 校雪館正字가 되고 掌令密陽府使 等을 거쳐 1530年 司課01 되었다 이때 金安老를 登用하려는 論議를 反 對하다가 그의 -派에 依해 肅淸된 뒤 慶Y1l1I의 紫玉山에 入山하여 性理學硏究에 專念하였다 1537年 金安老-派가 去勢되자 宗簿寺슘正으로 侍講官에 兼職되었다 고 후 全州府尹01 되어 善政하여 領德碑가 세워졌고 고 當時 災難 에 대하여 올린 對策文01 뛰어나서 兵曹參判 同知經鑄事에 올랐다 이리하여 副提學吏曺, 禮曺 荊曺의 判書를 거 쳐 漢城府判尹이 되고 仁宗1年(1545年) 左贊成으로 院相01 되어 國事를 管掌했고 明宗이 卽位하자衛社功臣3等에 올랐다 이해 어머니의 病01 위독하여 사직했으나 院相當時 大尹인 尹任―派의 처벌에 미온적이었다는 理由르 탄핵 되어 사직하고 明宗갬三(1547) 尹元衡 등 小尹-党01 조작한 良才驛壁書사건에 연루되어 江界로 流配되어 配pR에서 I 58 法務士]1 일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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