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고 都邑을 定하였던 위치가 어디였을것인가에 대 2126年)의 규모가 東西로 600間 南北이 100間이나 한關心이 우리 한민족全体의 일이고 꼭밝혀야할 되었으며 25年만에 完成하고 사림이 1萬名을 收容 과제라고생각한다. 이 점에 대하여 籠者의 所見온 할수 있는巨大한궁궐이 있었다하니 그 宮터라도 다음과같다. 發見되면우리民族으로 서는고以上의자랑거리와 첫째 옛 단군조선의 서울은 지금 中國땅 吉林이 였 을 것이라고 믿고 그 이유는 앞에서 밝힌바와 같이 千年을 전후하여 많은 史科가 전해지고 있으나 高麗 이후의 著書는 그 당시있던 史科에 의한 저술이고 실제 現地를 답사하고 四方흩어져 있는 史書등을 충분히 詳考하여 13年이라는 긴 세월동안 高句麗時 代부터 전래되고 있던「檀奇古史효曰夏元한거나다 보람되고 民族自負心이 넘쳐 흐를것으로期待하면 서 하루 속히 단군조선의 도읍지를 발굴되기를 기원 또기원하는바이다. 끝으로 「桓仁」이라는 地名이 오늘까지 傳來되고 있는 由來를 생각해보면 이곳에 우리 民族의 元始沮 라고 할수 있는桓仁, 桓雄 桓儉의 세 분의 聖賢께 서 이곳에 반드시 살았거나 王宮이 있었거나 하여 름없는 大野勃선생이 남긴 檀奇古史에서 지적하는 우리의 옛祖上들께서 지은地名이고 中國에 빼앗긴 扶餘吉林平壤이 라고 한 事實올 가장 신빙성 이 있다 지 二千年이 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그 地名이 남아 고 판단되고 또 하나의 理由는 왜 하필 吉林地域에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고 高句麗와 渤海가 세웠겠느냐고 묻는다면 고당시 우리의 領土는 四方 그곳에서 또 나라를 세워서 檀君의 뿌리를 지켜온 五萬里가 넘는 넓은 땅을 가졌기 때문에 그 中央地 点이 吉林땅이라고 생각되고 筆者가 數十年間 古代 史硏究에 몰두하고 깨달은 것은 吉林省內에 있는 지 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地名으로 「桓仁」이 라는 곳이 있고 여기에 「五女山城」이라고 高句麗의 始祖朱蒙 (東明聖王)께서 都邑한 곳이고 그 다음은 高句麗가 滅亡할 때 많은 軍事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가서 “渤海'라는나라를 세운大社榮將軍이 또 이곳에 都 邑올 定하였던 것이댜 이와같이 高句麗와 後高句 麗라 할 수 있는 渤海가 어찌하여 桓仁의 五女山城 지대를 서울로 定하였겠는가. 그 根源을 깊이 생각 해 본 結果 策者는 그곳이 바로 檀君聖視가 朝鮮이 라는 나라를 세우고 都휠也로 定하였던 阿斯達이 여 기였을 것이라고 무릎을 치고 기뻐하였다. 첫째 檀 奇古史에 吉林平壤이라하였고 그 外 여러 學者들이 松花江아시달하르빈等地의 위치를말하고있는점 온 桓仁池域과 바로 가까운 곳이다. 筆者의 所見으 로 아쉽고 슬픈일은 아직까지 遺跡이나 유물을 발견 치 못하고 있는데 桓仁地方을 살피고 파 볼 수 있다 면 4代檀君때 創建하였다는 乾淸宮(전청궁)(B.C 깊고 깊은 연유가 있었을 것이고 지금은 中國人이 되었지만 吉林省일대와 옛 만주땅에는우리의 祖上 과 先人들께서 代{t로 살고있는 뿌리깊은 곳이므로 古代조선때 國土가 四方五萬里요 人口가 一億人이 였다는 記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 中國人의 약 3分의 1은 우리 同族의 피를 가지고 있는 한민족 일 것이라고 추측되고特히 이 ‘l旦仁”이라는地名은 옛 우리의 祖上들께서 지은 이름일 것이고 그러므로 우 리 민족의 옛 祖上님 의 영혼과 天佑神助가 있었다고 確信하는바이다. 단기 4338년 開天節에 김 병 태 | 법무사(서울중앙회) 대만법무 사업21 69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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