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법무사 9월호

대한법무사협회7 1 설악산은 설악산대로 금강산은 금강산대로 자 태가있으리라생각한다. “만물상대자연을사람아묻지마라 눈도미처못보거니입이능히말할손가 만물상알려거든가보소하노라.” 라는글귀로대신하고싶다. 우리 나라는 유난히 대산(大山), 대천(大川)이 많아한민족은산에서태어나산으로가는, 산과 더불어인생을시작하고마감하는민족이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명산인 금강산은 우리민족 에게 산 이상의 정신적 상징이며 민족을 하나로 묶는구심체가아닌가한다. 주위에서금강산관광간다고하면농담삼아북 한에핵개발하는데왜 도와줄려고하느냐하지만 숙소인 금강산호텔 뒷마당에서 작업하는 북한주 민들을 보니 옷 입은 것하고 얼굴모습이 너무나 안스러워그늘진북한사람들에게도움이되었으 면하는생각도든다. 하루속히남북통일이되어 검문,검색없이자유 롭게왕래할수있다면얼마나좋겠는가? 현재는 외금강 중 일부만 개방되어 있지만 앞 으로 내금강 등이 개방되면 금강산의 제일 높은 비로봉(毗盧峯)(1,63미8 터)을꼭등반하고싶다. 비로봉 올라가는 길은 금사다리, 은사다리를 꼭거쳐야한다고한다. 올라가는바위가아침에는은빛으로보이고저녁 에는금빛으로보여붙여진이름이라고한다. 정상 비로봉 밑에는 용마석과 신라 최후의 왕 자인마의태자(麻衣太子) 무덤이능이라기보다는 너무초라한무덤이있다고한다. “태자의 몸으로 마의를 걸치고 험산에 들어온 것은 신라의 천년사직을 망쳐버린 비통을 한 몸 에 짊어지려는 고행이었으리라. 울며소맷귀 부 여잡는 낙랑공주의 섬섬옥수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할때에대장부의흉리(胸裏)가어떠했을까? 천년사직이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고태자 가 신지 다시 천년이 지났으니 유구한 영겁으로 보 면천년도수유(須臾)이던가? 고작칠십생애에희로애락을싣고각축하다한 움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 하니 의지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愁 愁)롭다.” 1957년경 고등학교국정국어교과서에실린 정비 석(鄭飛石)의산정무한(山情無限)의일부분이다. 힘들기는 하였지만 중간에 포기하지 아니하고 천선대를다녀온것을다행으로생각하며하산길 내내 어릴적 집에 있던 금강산기념 사진첩들을 보면서나도성장하면금강산을다녀오겠다고한 기억과고등학교국어담당교사님의산문산정무 한(山情無限) 명해설을 되새기면서 하산하니 그 좋았던 날씨가 갑자기 변하여 비가 오기 시작하 였다. 천만다행이었다. 금강산의별맛인온정각에북한측이직접운영 하는옥류관의금강산분점평양쟁반냉면을먹으 면서 때묻지 않고 자연그대로 금강산 지역이 오 래 보존되고 하루 빨리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기 원하였다. 유 홍 준│법무사(서울중앙회) I

RkJQdWJsaXNoZXIy ODExNj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