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法務士1 월호 1957년도 막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필자는 동료 세 사람과 함께 마포의 김상돈 국회 의원 댁을 방문했었다. 잘 알려져 있던 바와 같이 김의원은 재선 국회의 원이면서 이후 서울시장을 역임했었던 당대 추앙 받던 정치인으로서 특히 시커멓게 압도하던 카이 져 수염이 그분의 독특한 심벌(?)이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매우 지엄한 듯 그런 강렬한 인상 때문에 감히 접근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정작 대 하고 보니까 역시 소문대로 정감이 넘치는 호걸이 면서 화합의 달인으로도 이미 명성이 높았던 분이 였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현 마포경찰서 쪽 나지막한 언덕 좁은 골목길을 비집고 김의원 댁 대문을 들어서자 마침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활짝 열린 대청마루에서 김의원이 사 모님과 함께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정치인이라기보다는 결혼식 주례선생으로 더 잘 통하지...”김의원은 그새 사진첩을 뒤척이면 서 수백 쌍의 주례 기억을 열심히 퍼 나르고 있었다. 한편 김의원 곁에서 마냥 미소만 짓고 있던 사모 님은 그저 수더분하여서 전형적인 우리 아낙들과 별로 다를 게 없겠거니 그렇게 지레 접고 말았으나 사실은 내밀하면서도 왕성한 헌신을 통해서 그동 안 김의원의 입지를 가장 탄탄하게 지탱해 온 버팀 목이였다는 사실을 넌지시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김의원의 설명 가운데 미진한 부분이 있을 때마다 살갑게 거들며 그 마무리까지 깔끔하 게 하던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김의원과 이렇게 세 시간여 자상하면서도 폭넓 은 소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여된 사명과 의지 등 사회구성원으로서 공유해야 할 진정한 가치 기준 을 인식시키는 데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인데 우리 자장면이나 시켜먹으면 서 남은 이야기 계속하기로 하지...”당시 국회는 노 장과 소장으로 양분되어 서로 헐뜯고 있던 때라서 이 당면문제를 자연스럽게 끼워 넣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전통가치관이 점차 붕괴되고 있는 현 대라는 생리가 관념적 정의와 양심에 반한다고 해 서 소위 노장국회의원이 소장국회의원을 질타하고 소장은 소장들대로 세계진운에 걸림돌이라고 노장 들의 주장을 폄훼하던 때였다. 사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변화를 매끄럽게 수 용할 자세가 되어있지 않거나 그런 의지가 없다면 위기의 분산은 물론 내성을 잃고 만성적 후진에 머 물 수밖에 없다는 소장들의 주장이 사회적 동의를 얻는데 결국 성공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토론을 통한 끈질긴 호소와 설득이 주효했던 대표적인 사 례가 아니었던가 싶다. 역사속명사와 차한잔(Ⅲ) 隨│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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