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법무사협회 17 한국전쟁의 개전을 두고 북침설이 있어 왔다. 1949년 봄, 미국은 한국군 훈련을 담당할 500명의 병력만 한국에 남겨두고 전 병력을 미국본토 로 철수하였다. 그리고 6.25 전날인 1950년 6월 24일 토요일 밤, 서울 용산에서 채병덕 참모총장 을 비롯한 육군 수뇌부가 주요부대의 지휘관들과 함께 육군 장교 클럽 개관파티를 벌려 그 익일 새 벽까지 술과 댄스를 즐겼다. 국군장병의 3분의 1이 주말을 맞아 외박과 휴가를 나갔으며, 육군 수 뇌부가 술에 만취하여 비몽사몽(非夢似夢)간을 헤매고 있을 시각에 북한군이 새벽에 기습으로 38 도선을 넘어왔다. 1990년 옛 소련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북한의 김일성이 남침을 건의하여 스탈린 의 승인을 받았고, 중국의 마오쩌뚱에게 지시하여 남침 시에 중공군을 파병하라는 문서가 발견 되 었으며, 북한군은 소련제 T-34 탱크로 무장을 하여 38도선 전 지역으로 물밀듯 내려왔으며, 국군 은 개전 초에 탱크 한 대도 없어 사상자가 속출하였는데 국군이 먼저 북한으로 북침을 하여 스스로 묘지를 판다는 것은 건전한 상식 밖의 일이다. 최초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스탈린은 처음에는 한국 전쟁에 미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여 전쟁을 승인하였으나, 나중에 미군이 이 전쟁에 개 입하자 중공군을 참전하도록 마오쩌뚱에게 지시를 하여 미군과 중공군이 전투를 하는 것을 은근히 즐겼다는 설까지 (미국과 중공이 피탈나게 싸우면 양국의 전력이 소모되어 소련이 세계 제1위의 강 국이 된다는 논리)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지금에 와서도 남한의 북침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백일 몽 환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과 같이 6월 25일 새벽을 기하여 파죽지세로 내려온 북한군의 남침에 의해 대한민국은 풍전 등화의 신세가 되었다. 김일성은 빠른 시일 내에 남한 전역을 점령하여 1950년 8월 15일을 기해 서 울에서 적화통일의 기념식을 하기로 계획을 하였다는 것이다. 개전 3일만인 6월 28일 드디어 서울 은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패잔병이 된 우리 국군은 돌아올 기약 없이 끝없는 남하를 계속하였다. 이 전쟁에서 국군이 승기를 잡게 된 3개의 주요 전투가 있다. 첫째, 개전 초기의 춘천전투가 있다. 춘천전투는 1950년 6월 25일부터 6월 30일까지 춘천·홍천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 는 국군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의 지휘하에 전 장병들이 일치단결하여 소련제 탱크로 무장한 북한 군2사단에 맞서 일대 타격을 가하여 북한군 24,000명 중 40% 이상의 전력손실을 입혀 적군의 서 울 입성으로부터 3일동안 춘천 입성을 지연시켜 전쟁초기의 국군을 보호한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춘천이 바로 함락이 되었다면, 동부전선에서 북한군이 빠른 속도로 남하하여 서울 에 입성한 북한군과 동부전선의 북한군이 연결을 하여 대부분의 국군병력을 완전 포위하려는 계획 이 서 있었는데 춘천전투에서 시일이 지연되는 바람에 국군이 포위망을 벗어나게 된 것이었다. 크輯후송훔士協會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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