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법무사 8월호

18 法務士2010년 8 월호 실제로 북한군의 동부전선 담당 제2군단장 김광협 소장이 전쟁 초기에 바로 강등되어 교체된 것 을 보면 춘천전투가 얼마나 중요한 전투인지 알 수가 있다. 다음으로 맥아더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었다. 미국에서 인천상륙작전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고위층이 위험한 작전이라고 하여 반대론이 비등 하였다. 그러자, 맥아더는“여러분들이 불가한 작전이라고 생각하면 적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기 때 문에 이 작전은 성공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설득에 성공을 한 것으로 그의 추진력, 전투에의 철저 한 통찰력과 혜안이 성공의 열쇠였다. 그러나, 그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이 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것이란 낙관론과 중공군 이 이 전투에 일부 참전한 낌새를 부하로부터 보고를 받고도 묵살하고 거침없는 북진명령을 내려 운산전투에서 밀리고 장진호의 혹한 속에서 중공군에 의한 포위 등으로 고전을 겪었으며 드디어 흥남부두철수로 연결되었으나 그의 인천상륙작전만은 희대의 걸작품이었다. 다음은 대구근교에 있는 칠곡 다부동 전투였다. 당시의 전황은 대구, 부산,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 전역이 북한군의 치하에 들어갔으므로 대구와 부산 양대 도시는 상호 교두보 역할을 담당할 전략상 주요거점이었다. 때문에 낙동강 최후의 방어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는 아군으로서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 바로 대구근교 전투이 었던것이다. 이 전투는 1950년 8월 초순경부터 약 45일간 밀고 밀리는 처절한 대혈전의 연속이었다. 실제로 이 전투는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또는 상륙작전이 끝난 후의 전선을 가다듬기 위하여 상호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이 전투의 승패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여부에 지대 한 영향을 미치는 전투인 것이었다. 다부동전투는 국군 제1사단장인 백선엽 장군이 7,600명의 병력으로 북한군 21,000명을 상대로 한 1:3의 전투였으며 백선엽 장군은“이 전투는 대한민국의 국운이 달린 전투이다. 반드시 승리하 여야 한다. 만약 내가 후퇴를 하면 귀관들은 나를 사살해도 좋다”라고 하고는 전투의 선봉에 서서 작전을개시하였다. 이 전투는 국군 제1사단과 미군 제1기병사단이 연합하여 북한군에 맞선 전투였으며 이 전투를 총지휘한 사령관은 미군의 워커중장이었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국군 2,300명, 미군 1,282명이 전사하였고, 여기에 비하여 북한군 3사단, 13사단, 15사단 등 3개 사단의 전사자 수는 국군의 2.47배인 5,690명이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정규국군뿐만 아니라 학도병과 군번 없는 소년병들이 자원 참전하여 나중에는 군 량이 떨어져 맹물에 배추잎만 먹고 국토수호에 매진을 하였으며 그들 중에는 정규 군사훈련도 받 지 못하여 대부분 꽃다운 청춘을 전지에서 산화한 것이었다. 데스크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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