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법무사 7월호

기획 번역 33 그리고 나서 30분 후 원자력발전소로부터 20km 권 내의 주민에게 피난 지시가 내려왔다. 오오쿠마 시민 전원에게 피난지시가 내려졌고 시민들을 태울 버스가 도착할 예정이니 가까운 집합소에 빠짐없이 모두 집합하라는 방재무선이 계속하여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집합소에서는 “산쪽(타무라시)으로 피난합니다. 관광버스가 준비되어 있으니 짐은 손가방 정도를 준비하시고 애완동물은 데리고 올 수 없습니다. 그 리고 개인 승용차는 움직이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라는 소방단원들의 설명이 있었다. 산쪽으로 통하는 도로는 하나뿐이었다. 거북이 등처럼 균열되고 함몰된 도로가 많아 자동차가 한 대라도 도로상에서 멈추어 버린다면 주민들 전원이 피난을 할 수 없었으므로 개인용 승용차로는 피난 을 하지 말아 달라는 당부를 받았다. 집합소로 설명 을 하러 온 소방단원들도 어디로 가는 것인지, 원자 력발전소에서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위대 트럭에서 10시간 이상 헤매다 피난소 입소 곧 한 대의 버스가 도착했다. 고령자와 어린아이 를 데리고 있는 가족들을 먼저 태우고 다른 사람들 은 피난소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몇 대의 버스가 더 왔고 점심시간이 지난 즈음 자위대를 태운 트럭 몇 대가 계속하여 도착했다. 남아있던 주민들은 전원 그 트럭 몇 대에 나누어 탔고, 오오쿠마시를 멀리하 고 산쪽으로 피난하였다. 산쪽으로 난 좁은 도로는 피난하려는 자동차와 자위대의 트럭으로 심한 정체 상태였다. 우리를 받아주기로 되어 있던 곳에서는 “이미 정 원이 넘어섰으니 다른 곳으로 가주었으면 좋겠다” 며 거절하기를 수차례. 우리를 받아줄 새로운 장소 를 물색하면서 목적지 없이 산중의 도로를 수십 대 의 자위대 트럭이 긴 행렬을 지어 방황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휘발유를 잔뜩 실은 트레일러도 동행하 고 있었다. 우리는 결국 자위대의 트럭 몇 대에서 10시간 이상을 보내야만 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우리들이 도착할 피난소가 결 정되었으나 바로 입소할 수는 없었다. 스크리닝 검 사를 받지 않고서는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오리야마시 내에 설치된 검사장에 검 사를 받을 주민들의 긴 행렬이 만들어졌다. 기준치 를 넘긴 주민들을 위한 제염 텐트가 설치되었다. 우 리는 집에서 가지고 온 담요 한 장을 몸에 두르고 피난소에서 휴식을 취한 후 다음날 아침 다른 피난 소로 이동하였다. 피난소에서 제일 처음 제공된 식사는 주먹밥. 랩 처리도, 접시 같은 것도 없었다. 맛도 없고 아무것 도 섞이지 않은 하얀 밥으로만 만들어진 주먹밥을 받았다. 현장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소금간도 안되어 있었어?”하고 놀라지만 전기, 가스, 수도 등 의 생활기반 시설이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수백인 분의 밥을 준비하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 을까? 두 번째 피난소는 오오쿠마 주민들만을 모아놓은 고등학교의 체육관이었다. 처음에는 500명 정도의 주민이 의탁하고 있었다. 게다가 눈이 내리는 추운 계절에 찬 기운이 감도는 체육관에서 담요 한 장. 난로는 등유가 없어 낮 동안은 사용하지 말라는 지 시가 있었다. 고령자도 어린 아이들도 모두 똑같은 환경이었다. 다음날 가족들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 게 되었지만 휘발유가 유통되지 않아 가족들을 데 리고 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동안은 피난소에 있기로 하였으나 그 당시 는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는 지역주민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내가 있었던 피 난소는 해일의 피해가 없었으므로 비교적 밝은 분 위기였고, 전혀 얼굴조차 알지 못하던 주민들도 지 진이 있었던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떻게 피난을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웃으면서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였다.

RkJQdWJsaXNoZXIy ODExNj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