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법무사 7월호
56 『 』 2012년 7월호 전쟁과풋사랑 박 형 락 I 법무사 (서울북부) 수상 문전박대. 이제저를찾아오지마세요! 6·25전쟁이 한창일 때다. 8240부대의 유격대원을 훈련시키는 군 요새인 작은 섬. 나는 이곳에서 6개월간 훈련을 받고 5일간 휴가를 얻어 피란 온 고향친구들이 있는 부산으로 나왔다. 이때 전쟁은 중부전선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한창이었고, 부산 거리는 피란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나는 당시 부산에서 잠시 교제했 던 ‘김 여정’을 찾기 위해 친구 C에게 그녀의 근황을 물었다. 그런데 C는 다짜고짜 “그녀는 이제 찾지도 말고 잊 어버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C가 “둘 다 이북에서 단신으로 피란 온 처지이니 서로 통하는 점이 있을 것”이라며 교제해 보랄 때는 언제 고이제와서그녀를찾지말라는이유가무엇인지궁금했다. 또, 섬에서의부대생활이외롭고힘들어그녀를만나 한마디위로의말이라도듣고싶은마음에무작정부산영도의영선동피란민촌에산다는그녀를찾아나섰다. 영선동 피란민 촌에는 밋밋한 비탈에 아무렇게나 지어진 판잣집 수백 채가 옹기종기 들어차 있었다. 번지도 문패도 없는 이런 곳에서 그녀를 찾는다는 것이 참으로 무모한 일이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었지만 나는 포기하 지 않았다. 고향친구들은 부두노동으로 겨우 입에 풀칠하는 피란생활을 하고 있으니 나와 노닐 시간이 없었고, 딱히 휴가 동안 가볼 곳도 없고 하여 요행으로 그녀를 찾으면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속 시원히 알 수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나는 동네의 골목을 아래쪽에서부터 하나씩 훑으면서 천천히 위쪽으로 올라갔다. 늦잠 자는 사람은 아직도 꿈속에 있을 이른 아침이었다. 간혹 이른 아침밥을 짓는 집의 연통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일 뿐, 마을 은 조용하고 출입문은 모두 굳게 닫혀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 어느 골목길 판잣집 앞에 이르렀을 때, 물이 담긴 큰 대야를 두 손으로 무겁게 움켜잡고 허리를 구부리고 문밖으로 나오는 여인과 2, 3보 앞에서 딱 마주쳤다. 파마머리는 풀어지고 옷은 시골 아낙네 차림인데, 자세히 보니 바로 내가 찾는 그 ‘김여정’이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나를 본 그녀는 뿌연 물이 담긴 대야를 든 채 얼어붙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느닷없이 군복 을 입고 나타났으니 놀랐을 것이 당연했다. 나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여서 머뭇대며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그녀는 당황스런 표정으로 “여기를 어떻게 찾았어요? 이젠 저를 찾아오지 마세요! 저는 좋은 혼처가 생겨 결혼하기로약속한사람이있어요”하고말했다. 나는그제서야 C가왜그녀를찾지말라고했는지알수있었다. “저는 더 할 말이 없어요. 안녕히 가세요!” 매정하게 말을 내뱉고는 그녀가 쌩하니 판잣집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나는 닫힌 문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곳을 떠나왔다. 아마도 그녀는 C를 통해 내가 당시 전사할 확률이 가장 높다는 부대에 지망해 간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나와 장래를 약속한 일도 없는데다, 그녀의 편지를 받고서도 답장을 하지 않은 채 말없 이 부산을 떠나왔으니 그녀가 무슨 정에 이끌려 나를 반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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