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법무사 7월호
수상 57 그래도 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와 영도의 남쪽 해변에서 전시의 청춘을 함께 고민한 일도 있었고, 그녀의 편지로 인해 피란생활의 외로움과 인정에 얼어있던 차가운 마음을 잠시나마 녹일 수 있었다. 그때 그녀 의 편지 내용이 조금 아리송하기도 했지만, 난생 처음 이성으로부터 편지를 받고 울렁거리던 마음을 못 잊어 찾아왔건만 이렇듯 문전박대를 당하다니. 하지만 이때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인정사정을 가리지 않는 전쟁시절이었다. 그녀는 혹시라도 나로 인해 고된 피란생활을 면할 수 있는 좋은 혼처를 놓칠까 하여 과민반응을 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나는 못내 그녀에 대한 야속함을 버리지 못하고 남은 휴가기간을 무료히 지내다 부대로 복귀했다. 재회. 풋사랑의상처를안고… 마침내 6·25전쟁이 휴전으로 끝이 났다. 나는 다행히 살아남았다. 다음해 부대에서 귀가 조치를 내렸지만 나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고향도 가족도 없는 대한민국. 이 대한민국을 위해 군복을 입었건만 오라는 데도, 반 겨 줄 사람도 없었다. 나는 서울행을 하기로 결정했다. 예부터 ‘아들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고 했는데, 어디를 가도 타향임엔 마찬가지, 이왕이면 서울로 가자는 생각이었다. 전쟁으로 서울은 온통 폐허가 되어 있었다. 대문 앞을 쓸고 밥 한 끼 얻어먹으려 해도 그럴 만한 대문이 없 었다. 하지만 나는 운 좋게도 서울에 온 지 4개월 만에 취직을 했다. 그것도 부대(정보교육 부대) 영내에서 숙 식을 할 수 있고 봉급도 대학 등록금을 내고 조금 남을 정도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대우의 직장이었다. 나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학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균등한 ‘자유 대 한’이 아닌가. 실력을 길러 놓으면 언젠가는 더 나은 기회가 올 거라고 믿었다. 나는 타고난 강한 체력을 바탕 으로 학문에 청춘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늦은 나이지만 대학에 입학했다. 직장에서도 근무는 야간에 하고 낮에 는 대학에서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었다. 굳은 결심이었지만, 목표를 지키는 데는 여러 유혹도 따랐다. 같은 직장에 근무하던 영문 타자수 아가씨는 자신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미국인의 초청으로 가족 모두가 미국 이민을 가게 되었으니 함께 이민을 가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미국 이민이란 엄청난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아직 ‘김여정’과의 풋사랑에서 얻은 마음의 상처가 남아 있었다. 또, 쇼펜하우어의 『인생론』 에서 “여자를 품에 안았을 때 그 촉감이…” 운운의 글을 보고서 ‘여자는 함부로 가까이 말자’는 좌우명을 세우고 공부에 매진할 때였다. 결국 나는 그런 유혹들을 뿌리치고 대학을 졸업했다. 그런데 대학 졸업 후 부대가 해체 되면서 실직을 하게 됐다. 그래도 나는 당시 종로 5가의 중고 책방을 다니며 2,30% 싸게 책을 구입해 전공 공 부를 계속 해나갔다. 그래도나는아쉬운마음이들었다. 그녀와영도의남쪽해변에서 전시의청춘을함께 고민한일도있었고, 그녀의편지로인해피란생활의외로움과 인정에얼어있던차가운마음을잠시나마녹일수있었다. 난생처음이성으로부터편지를받고 울렁거리던마음을못잊어찾아왔건만이렇듯문전박대를당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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