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법무사 7월호

58 『 』 2012년 7월호 이별. 서로갈길을가야할운명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책을 사러 종로에 나갔다 오던 길에 문득 어느 골목길로 들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꼭 김여정, 그녀와 비슷했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뛰어가며 “저, 여정 씨 아니세 요?” 하고 말했다. 여자가 놀라서 뒤돌아섰는데, 내 생각이 맞았다. 김여정, 그녀였다. “아니, 박 선생 아니세요? 어떻게 저를 알아보셨어요?” 깜짝 놀란 그녀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나는 ‘박 선생’이라는 처음 듣는 호칭에 약간은 어리둥절해졌지만, “네. 그 동안 잘 지냈어요?”하고 말하고는 자세히 그녀를 보았다. 시장바구니를 들고 있는 행색이 어쩐지 초 라했고, 바구니는 별로 든 것 없이 비어 있었다. “저, 죄송한데 제가 지금 얘기할 시간이 없어요. 서둘러 집에 가야 하거든요. 혹시 내일 2시에 시간이 있 으면 저 다방에서 만나기로 해요.” 나는 그녀가 가리키는 다방을 돌아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다방에 나갔더니 그녀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화장도 하고, 옷도 맵시 나게 차려 입었는데 웃는 얼굴에 보조개가 또렷한 게, 부산 에서 처음 만났던 처녀 때의 모습처럼 예뻐 보였다. “전에 저를 찾아왔을 때 위로의 말 한 마디 없이 박절하게 대한 거 정말 미안해요.” 그녀가 지난 일에 대해 사과를 했다. 그러면서 내게 결혼을 했느냐고 묻기에 나는 아직 미혼이라고 대답했 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조심스러워졌다. “저는 그때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노예를 부리듯이 혹독하게 시집살이를 시켜요. 남편도 거기 가세해 구박을 하니 살 수가 없는 지경이에요. 박 선생이 성북동에서 무슨 시험 준비를 하고 계 시다는 말을 전해 듣고 한 번은 너무 힘들어서 집을 뛰쳐나와 성북동엘 갔었어요. 혜화동에 있는 보성고등학 교 뒤 고개까지 가서 성북동 골짜기의 그 많은 집들을 바라보고는 그때서야 내 생각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 고 집으로 돌아왔지요.” 그녀는 왜 그렇게 괴로울 때 나를 찾을 생각을 했을까. 나에 대한 사랑의 불씨가 조금은 남아 있었던 것 일까? “혈혈단신으로 피란을 와서 친정도 없고 돈도 없어 결혼할 때 예물도 혼수도 못했어요. 그런데 늘 그것을 꼬투리 삼아 툭하면 맨 몸뚱이만 가지고 시집을 왔으니 몸뚱이로 때우라면서 모질게 대하는 거예요.” 힘들게 사연을 털어놓는 그녀에게 나는 아무런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시어머니는 머지않아 노쇠해질 것이고 시누이들은 출가해 나갈 것이니 조금만 참고 살아 보세요.” 우리는 다방을 나와 헤어졌다. 더 해야 할 말도 없었고 서로 갈 길로 가야 할 운명이었다. 그녀는 순정을 버리지는 못한 채 행복을 찾아 떠났지만 결국 그것을 얻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녀로부터 홀대 당 한 상처를 딛고 결연히 학문의 길을 택해 정진한 덕에 자유 대한의 국가공무원이 되었다. 이것도 기회 균등 한 자유 대한의 혜택이라면 혜택이랄 수 있을까? 격랑의 세월, 부산 피란시절의 내 풋사랑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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