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법무사 2월호

68 수상 2~ .2. 아버님묘를 모시기까지 ‘애국지사묘역’에 ....... • 저의 아버님은 만 16세에 3·1 독립 만세운동에 가 담, 옥고를 치르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후손 되는 저 희들은 그 사정을 모른 채로 수십 년을 지내오다 뒤 늦게나마 이를 알게 되어 정부로부터 추서(追敍)를 받고, 묘소도 대전 국립 현충원으로 모시게 되었습니 다. 기독교인인 저로서는 이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되어, 이와 관련해 그동안 제가 겪어온 사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짧은생을살다가신 아버지의 비밀 저의 아버님은 1903년 8월 4일, 경북 의성군 비안 면에서 태어나 1954년 9월 7일에 지병으로 별세, 짧 은 생을 마치셨습니다. 아버님의 사적(私的)을 늦게 알게 된 이유는 제가 불민(不敏)한 점도 있었으나, 제 가 너무 어릴 때 별세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은 살아생전 저에게 일제시대 때 징역살이를 했다는 말 씀은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본 순사들이 이 헌 구 1 법무사(대구경북회) 유리병을 깨어놓고 그 위를 맨발로 걸어가라고 해서 발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는 말씀은 한 번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그 참혹함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던 나이 였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민 족에게 얼마나 모질고 잔악(殘惡)한 고문과 학대를 행했던가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 아버님뿐 아니라 함 께 만세운동을 했던 동료들도 비슷한 고난과 고초를 당했을 거라 짐작됩니다. 이렇게 나라 잃은 민족의 서러움과 애환을 저는 아버님의 사적을 보면서 느낄 수있었습니다. 저는 아버님이 겪은 이력이 필경 우리나라의 독 립운동사에 기록되어 있으리라 믿고, 1998년 초봄 에 아버님께서 생존하셨던 고향을 찾아갔습니다. 우 선 연세 많은 어르신들이 모여 계시는 노인정을 찾아 가 큰 절을 올리고, 아버지의 함자가 ‘이자, 종자, 연 자(李鐘淵)’라 말씀드리고 “그 아들 이헌구입니다’’ 하 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중에 배씨 성씨를 가진 한 어르신이 “내가 너의 아버지 후배가 된다”고 하시더니, “너의 아버지 이름은 ‘이종연’이 아니고 ‘이일만'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 듣는 얘기에 깜짝 놀랐습 니다. 어르신은 "지금도 당시 3·1 독립운동에 가담해 투옥된 열아홉 분의 이름을 새긴 비석이 있다"면서 면사무소와 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사적비’로 저를 안내했습니다. 그 비문에 새겨져 있는 아버지의 성명 『t1 내수 』 201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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