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법무사 2월호

"너의 아버지 이름은 ‘이종연’이 아니고 ‘이일만’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 듣는 얘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어르신은 "지금도 당시 3·1 독립운동에 가담해 투옥된 열아홉 분의 이름을 새긴 비석이 있다"면서 면사무소와 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사적비’로 저를 안내했습니다. 그 비문에 새겨져 있는 아버지의 성명이라는 "이일만"을 보고는 "아 이런 일도 우리 집안에서 있었구나''하고 L신비한 감회에 젖었습니다 이라는 “이일만"을 보고는 “아. 이런 일도 우리 집안 에서 있었구나“하고 신비한 감회에 젖었습니다. 고향에서 돌아온 저는 곧바로 보훈청에 아버지의 함자가 ‘일만’에서 ‘종연’으로 개명된 사실이 기록된 제 적등본과 당시 아버지가 참여했던 3· 1 독립만세운동 에 관해 기록돼 있는 『대구 경북 항일독립운동사」 의 p.131, 의성군에서 발간한 『항일투사의 사적』 p.222 를 적시한 서류를 전달했고, 그 후 1999년 8월 15일, 국가로부터 국가유공자 대통령 포상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독립운동 재판 기록 『대구 경북 항일 독립운동사』에는 아버지가 3 • 1 만 세운동으로 재판을 받았던 당시의 판결문 요지가 아 래와같이 실려 있습니다. 대정 8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 조선총독부 판사 목촌사랑(木村四郞) 대정 8년 형공 제336호 판 결 경북 의성군 비안면 쌍계동 농업 이일만(李-萬) 당시 16세 위에 대한 보안법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대정8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피고 등을 각 징역 7월에 처한 다는 판결에대하여 피고 등으로부터 공소를 신립하므로 당원은 조선총독부 검사 촌상청(村上淸)의 간여로 심리 하고 판결을 다음과 같이 한다. 주 문 원판결을취소한다 피고 이일만, 박세길, 박인옥, 배용석, 배용도를 각 징역 7월에처한다 그리고 판결문이 실린 면의 하단에서 필자는 그 사 건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안면의자랑 풍운 짙은 |日韓末 開化사상에도 앞장서서 신교육의 보급에도 일찍이 등불을 밝히더니 己未年3·1 운동 때 에는 의성지방의 기수가 되었다. 그해 3월 12일 比安 普通學校학생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의성군 내에서 제 일 먼저 高唱하였다 玉女峰이 울리고 읍내가 진동하였 던 어울 지어 흐르는 淸)|l의 물결도 망국의 恨을 같이 하였다 日人 교장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의거 를감행한그들소년의 기개는민족의 양심을가장적나 라하게 나타내어 보인 증거이다. 쌍계교회를 주동으로 하는 만세 시위에 다같이 참여하여 동민과 함께 대대적 인 시위를 감행하였다. 비안 만세운동은 E3人교장의 회 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의거를 감행한 그들 소 년의 기개는 민족의 양심을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내어 보인 증거이다 쌍계교회를 주동으로 하는 만세 시위에 다같이 참여하여 동민과 함께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 였다.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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