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법무사 3월호
51 이 시원찮아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있지만 딸은 살 만하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용돈은 제대로 타 쓰세요?” K는 이 할아버지가 생활비가 부족하다며 가끔 돈 을 빌려가는 일이 있었으므로 딸이 약사라는 말이 잘 믿기지 않아 그렇게 물었다. “아녀. 지독한 노랭이랑게. 가끔 만 원짜리 한 장 내밀면서도 벌벌 떠는 년이여.” 그렇게말하면서 L 할아버지는슬픈표정으로웃었다. “어디서 약국을 하는데요?” 약사라면 늙어 혼자 된 아버지의 생활비 정도는 부 담해도 될 텐데 싶었다. 아무리 상처한 노인네라지만 늘 꾀죄죄한 차림새나 외모로는 의지가지없는 외톨 이로 뵈기 십상이었다. “길목이 좋은 데야. 번화가고….” 아들들 이야기를 할 때와 딸의 주변에 대해 들려줄 때의 표정이 분명 달랐다. 뭐랄까, 딸 이야기를 할 때 에는 애증이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남에게 자랑은 하고 싶은데 뭔가 입을 막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노 인이 요령부득으로 설명하는 곳을 지도로 표시하며 대충 살펴보니 평당 몇 천 만 원을 호가하는 K시의 중심가였고 병원 밀집지역이기도 했다. “와. 이런 곳에서 약국을 하면 돈을 많이 벌겠는데 요?” “많이 벌면 뭐해. 쓸 줄을 모르는디….” “식구가 많은가 보죠?” “누가? 딸이? 아녀. 독신이여. 혼자 살어.” 노인은 또 슬픈 표정으로 웃었다. “올해 쉰인디, 아 직 결혼도 안했어.” 그러면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설 핏 내비쳤다. “스물셋에 낳은 딸인디 공부도 지 혼자 했어. 내가 어디 아이들 핵교 보낼 형편이간디? 늘 입에 풀칠하 기 바빴재.” “그렇다고 약사를 하면서 가족들 부양한 것도 아닌 데 왜 여태 결혼을 하지 않았을까요?” “누가알어?결혼이나남자얘긴꺼내지도못하게혀.” 이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K는 L 할아버지의 가족들 에 대해 대충 감이 잡혔다. 늘 약국 주위에서 얼쩡거리 고 있을 세 아들들의 모습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약사누나가급사하자통장과현금턴세아들 그렇게 자신의 자녀들 이야기를 해주고 간 지 대략 6 개월쯤 지났을까. 어느 날, L 할아버지가 잔뜩 풀이 죽 은모습으로찾아왔다. 주름투성이인눈주위가한껏젖 어있는것으로보아며칠계속울었던것같았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무리 초라한 입성이었어도 늘 웃고 다니던 노인 이었다. “허허 참….” 노인은 소파에 앉은 채 또 한참동안 한숨을 내쉬었 다. 무슨 일이 단단히 생긴 게 틀림없다 싶었지만 K 는 노인이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딸이 죽었어.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야단이더니 고작 그렇게 뒈져 버릴 걸 가지고….” 한참 만에 들려주는 노인의 한탄을 듣는 순간 K는 그 딸의 불행보다도 노인에게 상속될 재산이 얼마일 까를 먼저 생각했다. 노인의 말이 맞다면 딸의 재산 은 모두 그의 차지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말 부터 꺼낼 수는 없었다. “아니, 어쩌다가요? 어쩌다가 그렇게 갑자기…? 이 제 갓 쉰이라면서요.” “누가 아니래나? 약사니까 건강관리 하나는 철저하 게 했을낀디 급사를 해버렸당게. 며칠 약국 문을 열 지 않아서 들어가 보니 그 지경이지 뭐여. 의사 말로 는 심장마비라는 기여.” 노인의 말을 들으면서 궁색한 그녀 동생들이 약국에 들이닥쳐 벌였을 행태가 눈에 선했다. 물론 이런 상상 은 그간 L 할아버지의 입을 통해 형성된 것이었다. K는 노인이 진정하기를 기다렸다가 몇 가지 문서 를 준비해 보라고 권했다. L 할아버지의 제적등본, 가족관계증명서, 딸의 가족관계증명서, 그리고 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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