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법무사 3월호
64 『 』 2013년 3월호 법무사의 서재 무채색의 스펙트럼 -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시인의 일생, ‘우울한 내면 풍경’ 그린 시집 1989년 어느 이른 봄날 저녁, 습관적으로 집어든 석 간신문 구석에서 「젊은 시인 기형도 요절」이라는 짤막 한 부고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당시 그 흔한 일단 부 고기사는 별다른 관심 없이 내 뇌리에서 잊혀졌고, 이 런 저런 잡다한 일로 그 한 해도 저물어갈 무렵, 오랜 만에 만난 한 문우의 술잔을 통해 ‘기형도’라는 시인의 이름이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는 제법 눈시울까지 적시며 기형도가 만 서른을 며칠 앞두고 파고다극장에서 심야에 죽은 채로 발견 되었다는 것,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중앙일보 기자 로 근무하였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시는 허무와 우울로 우리들의 심장을 파고들어 매우 전염 성이 강한 전도유망한 시인이었다며 그의 요절을 슬 퍼하는 것이었다. 그 날 문우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얄팍한 호기심으로 문학잡지를 모조리 뒤적거려 그의 신춘 문예 당선작이 「안개」라는 것, 그의 유고시집으로 『입 속의 검은 잎』이 발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음 날 즉시 『입 속의 검은 잎』을 구입하여 밤을 새 워 통독하면서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고독과 상실감으 로 흘러간 지난날의 아픈 추억들을 안주삼아 술을 마 셨다. 지독히 가난했던 시인의 유년시절, 우울이 내면을 지배했을 중·고등학교 시절, 절망으로 점철된 서울에 서의 대학시절이, 지나가버린 나의 과거와 오버랩 되 며 파노라마처럼 전개되는 동안 “새벽은 화차 속의 쓸 쓸한 파도를 한 삽씩 퍼올리고”(「폐광촌」) 있었다. “월말고사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우고”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는가 하면” “타버린 등잔불 심 지로 인하여” “엎드려서 공부하다가 코를 풀면 언제 나 검뎅이가 묻어 나왔던”(「위험한 가계 1969」) 나의 유년시절이 기형도의 시에 그대로 무영탑처럼 어른 거렸다. 가난과 배고픔으로 각인된 시인의 유년시절 체험은 후일 그에게 튼튼한 시적토대와 공간을 마련 해 준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대부분의 감수성 예민한 시인들이 그러하 듯이, 그의 시세계는 내적 자아에로만 칩거했을 것이 분명한 중·고등학교 시절을 훌쩍 뛰어넘어 서울에서 의 대학시절과 사회생활로 급전한다. 70년대 말과 80년대 초에 걸쳐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던 나는 기형도 시인과 마찬가지로 “돌층계 위에 서 플라톤을 읽었고,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으며 목련 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다”(「대학 시절」). 나는 방학 때와 수업이 없는 날이면 고향인 이리로 낙향하였고, 시인의 언어를 또 다시 빌리자면 “서울생활이란 내 삶에 있어서 하찮은 문장 위에 찍 힌 방점과도 같은 것”(「조치원」)이었다. 법학을 전공하였던 나는 고시공부 대신 카프카와 임 익 문 ■ 법무사(전라북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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