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법무사 9월호
67 눈물을 잃어버린 병, 내게도 찾아와 나이를 먹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노래방에 갔을 때 더 이상 내가 부르는 노래들이 신곡 코너가 아닌 '가 나다'순 어딘가를 뒤져보아야 발견된다는 걸 알게 되 었을 때만은 아니다. 표정을 잃어버린 때, 그 때부터 우린 ‘철들었다’는 소릴 듣는다. 어른이니까 함부로 울어서도 안 되고, 어른이니까 헤픈 웃음도 안 되고, 어른이니까 분노를 무시로 폭발해서도 안 되고…. 느낀 대로 표현할 때 세상은, 특히나 권력은 불이 익을 돌려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생존의 이익을 위한 가면 쓰기. 학교와 군대와 직장과 그리고 이 세 계는 고통이나 아픔에 반응하지 않으며, 기쁨이나 행복에도 초연한 척하고, 불의와 부정에는 눈을 내 리감는 쪽을 선택하도록 나를 훈육시켰다. 타인의 욕망을 위해 나의 표정을 죽일 것. 비겁과 굴종으로 내 감정을 억압할 것. 이런 과정의 반복과 더불어 내 감정과 표정 위엔 무거운 돌덩어리들이 하나 둘 올려졌다. 표정을 잃어버리는 병은 자클린 에게만 찾아온 불행이 아니었던 것이다. 안데르센의 동화 한 편을 애써 기억해 내려 한다. 한 소녀가 왕자를 사랑하게 되는데, 왕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그녀는 눈물을 마녀에게 내놓는다. 왕자 와 소녀는 사랑하게 되나 왕자의 어머니가 아팠을 때, 소녀는 눈물을 흘리려 했으나 단지 속으로였을 뿐 팔아버린 눈물을 흘릴 수 없었고 예쁜 목소리로 웃어댈 뿐이었다. 왕자는 그 소녀를 떠난다. 난 무엇과 표정을 바꾼 것일까. 자클린 뒤 프레의 연주를 들으며 무표정하게 천 장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 녀는 12년 간 음악가로 활동했으나 14년 동안은 침 대와 휠체어 위에서 투병해야 했다. 마른 북어처럼 혹은 동태처럼 그렇게 뻣뻣하게 안면 근육이 굳어버 려 표정을 지을 수 없었고, 결국 호흡조차 못하게 되 어 숨을 거두었다. 표정 없이 살기엔 삶이 너무 짧다! 그녀가 침상에서 가슴을 치며 갈구했던 것은 무 엇일까. 하찮은 농담에 깔깔대며 웃기, 이별의 아픔 에 엉엉 울기, 원통하고 분한 마음을 악악 소리로 터 뜨리기,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랑하는 이에게 그 사랑 을 그윽한 미소로 전하는 일 따위가 아니었을까. 세상 만물이 모두 잠든 시각, 열대야를 견디지 못 하고 홀로 깨어난다. 아내의 고운 숨소리와 딸아이 의 뒤척임에 난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엉흐엉 소리 내며 울었다. 꿈 많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한 남자가 운다. 나는 이제 어른이 되었고 냉정한 머리를 가진 현실 주의자, 실용주의자가 되었다. 낙오하지 않기 위해 나는 늘 두리번거렸고 결국 내겐 왜소하고 불안한 표정만 남게 되었다. 행복을 바란다고 말했지만 실 은 돈을 원했고, 그 대가로 ‘감정과 표현’이란 삶의 마법을 잃어버렸다. 존재가 끝나는 순간, 나의 우주도 함께 문을 닫을 것이다. 죽음은 생생한 육체의 기쁨, 절망, 슬픔, 환희 의 감정에 막을 내리는 것 이상이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아는 순간은 내 안에서 솟구치는 것을 느 끼고 그 느낌을 포효할 때이다. 그렇다면 표정을 잃어 버린나는죽음을미리앞당기려한것이아닌가. 올 가을엔 자클린 뒤 프레의 「엘가 첼로 협주곡」 을 들으며 잃어버린 표정을 되찾아야겠다. 시대를 핑계 대며 표정 없이 생을 소모하기엔, 내 삶의 유통 기한은 너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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