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법무사 9월호

69 이들이 이 처참한 활극을 벌여가며 앞으로 나아가 는 이유는 무엇일까? 윌포드의 독재, 소수 상위계급 의 횡포로부터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되찾기 위해 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을 감수하는 폭력 과 우리 편 다수의 희생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감수 해야 한다. 그럴 가치가 있을까? 영화 후반부에 나오지만, 그 다지 효율적이지 않은 생존율과 인공적인 열차의 생 태계 속에서 처음과 마지막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는 순간에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설계자의 방에 들어선 네오의 당혹과 절망, 분노가 겹쳐서 떠오른다. 독재자 윌포드와 혁명가 길리엄의 연결·반복되며 계속되는 반란과 진압의 광경 속에서, 우리는 니체(F. Nietzsche)의 이른바 ‘영겁회귀(永劫回歸 ; Ewige Wiederkunft)’라는 개념을 적용해 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 반란은 좌절될 것이 예정되어 있기 때 문에, 하나마나하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 좋았을 까? 내가 믿은 정의가 순진무구하게 표상되고 실현되 지 못함을 알았을 때, 나는 또 하나의 악인이 되고 마 는 것인가? 이 고민에 대한 반전은 민수와 요나가 선택하는 일 탈에서 비롯되지만, 그 다른 가능성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아니, 니체 본래의 화법으로 힘주어 말하자면, ‘이런 모든 현상이 영겁회귀될 것이 다’는 결정론적 예언이 아니라, ‘영겁회귀되는 이 모 든 순간, 초인으로서 거부하고 깨부숴라’는, 운명애 (Amor Fati)의 촉발을 요구하는 경구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커티스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고, 그 렇게 해야만 했을 것이다. 자기 운명의 끝을 안다고 해서, 지금 멈출 수는 없는 것이다. 감독 혼자 쓴 시나리오의 한계, 빛나는 3명의 배우 봉준호 감독에 대한 필자의 애증도 일반 관객과 비 슷하다. 「괴물」과 「살인의 추억」에서 보여준 그 디테 일한 힘, 괴기스럽고 요상하면서도 파안대소하게 만 드는 묘한 말투와 캐릭터를 만들어 내는 능력, 실제 배우 및 스태프들 사이에서 현장을 장악하고 멋지게 소통하며 지휘하는 능력. 하지만 「마더」에서 보여준 바와 같은, 지나치게 거 장 흉내를 내는 듯한 어깨에 힘주기나 중간의 재밋거 리가 주제의식을 희석해 버리는 경우 등에 대한 아쉬 움도 있었다. 최대 자본을 가지고 최고의 스케일을 구현하며, 동서양 최고의 배우 및 스태프와 함께 할 리우드식 제작 시스템에서 만들어내는 이 작품에서 는 어떠했을까? 관객의 판단마다 다르겠지만, ‘일장일단(一長一短)’ 이었다. 거의 모든 배우들에게 찬사를 받을 만큼의 지휘력과 천재성, 기지 넘치는 화법과 대등한 자리에 서의 의사소통 등에는 큰 점수를 줄 수 있겠다. 하지 만 혼자 쓴 시나리오의 한계는 분명히 보인다. 아마 부정적 평가를 내린 대부분의 관객이 이 작품 을 아리송하다고 폄훼하는 것에는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물, 즉 ‘캐릭터와 스토리가 유기적으로 엮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 최고의 무술가가 덩치 큰 악당에게 가볍게 제압당해 죽는가? 그 악당은 터 미네이터처럼 서너 번이나 쓰러졌다 일어나서, 힘없 는 송강호의 몇 번의 펀치에 너무 쉽게 죽어 버린다. 또, 엔진칸에서는 전투와 화재, 아우성이 모두 끝 날 때까지 기다려 주면서 커티스와 윌포드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었을까? 폭탄은 어떻게 또 그렇게 딱 아마 부정적 평가를 내린 대부분의 관객이 이 작품을 아리송하다 고 폄훼하는 것에는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물, 즉 ‘캐릭터와 스토리가 유기적으로 엮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 최고의 무술가가 덩치 큰 악당에게 가볍게 제압당해 죽는가? 그 악당은 터미네이터 처럼 서너 번이나 쓰러졌다 일어나서, 힘없는 송강호의 몇 번의 펀 치에 너무 쉽게 죽어 버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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