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법무사 1월호

사로잡히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최대로 발 휘하고 있는 사람이 종교적 실존의 참다운 이상이다. (마) 죽음에 이르는 병 현대는 육체의 병에 비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상 실한 상태인 ‘마음의 병’이 깊이 진행하고 있으며, 여기에서의 회복을 구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조금 도 절망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러나 절망은 신앙에 이르는 통로이기도 하다. 인간으로 말하자면 죽음은 일체의 것의 최후이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의미에서는 죽음이 모든 것의 최후가 아니다. 죽는 것조차 할 수 없는 희망이 없 는 바로 그것이 절망이다. 절망은 끊임없이 안으로 파고들어 점차 자기를 먹어 치우는 가책이다. 그는 ‘인간이란 정신이다. 그러면, 정신이란 무엇 인가? 정신이란 자기이다. 그러면 자기란 무엇이 냐. 자기란 하나의 관계 그 관계자체에 관계하는 관 계이다.’라고 규정한다. 인간은 유한과 무한, 시간 과 영원,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다. 이 관계는 그에 의하면, 궁극적으로 신에 의해서 조정된 관계이다. 절망의 첫 현상은 자기의 절망을 자각하지 않는 절망(비본래적인 절망)이다. 이는 무자각한 삶의 방 식, 인생을 미적으로 향락하는 삶의 방식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는 자기의 절망을 자각하고 있는 절망(본래 적인 절망) 이다. 여기에서는 사람은 자기속에 영원 한 것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이 세상의 것 에 대하여 행·불행에 절망하고 영원한 것에 대해 서도 절망한다. 또한 자기 자신에 절망하여 고독 속 에 머물게 된다. 최후에 질적으로 가장 깊은 절망의 현상은 절망 반항이다. 그는 악마적인 광폭에 모든 사람에게 반 항하고, 자기의 고뇌를 자랑 삼으면서 바늘을 짊어 지고 가려한다. 악마적으로 굳어 틀에 박히는 것이 다. 그러나, 이 절망을 돌파할 수 있는 길은 자기의 질적 비약으로서의 신앙 이외에는 없다. 자기가 단독인 자기로서 하느님 앞에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 비로소 무한한 자기를 깨닫게 되는 것이 다. 인간이 고뇌와 절망에 의해서 최후의 막다른 골 목까지 왔을 때, 영원한 것의 가능성 하느님을 믿으 려는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가 최후의 분기점으로 된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얻기 위한 ' 광기의 싸움‘인 것이다. 이를 보더라도 키에르케고 르는 철저한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인 것이다. (3) 키에르케고르의 현대사상 및 족적(足跡) 그는 여러 생존상황 속에서 그의 생활체험을 깊 이 반성하면서 삶 속에 잠겨있는 이념성을 날카롭 게 파악할 수 있는 이념의 천재였다. 그가 120년 전에 예언한 정신, 문화상황이 현재 우리들의 현실 이 되었다. 키에르케고르의 저서를 읽으면 우리와 같은 세대에 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이러 한 의미에서 그는 뛰어난 현대인이라 할 수 있다. 실존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할 때 우리의 자각을 심화하고 진실한 삶은 깨우쳐 주고 있는 것이다. 자각의 전개를 미적 실존에서 윤리적 실존을 거쳐 종교적 실존으로의 3단계론은 눈여겨 볼 만하다. 그는 현대철학을 대표하는 실존철학의 개조(開 祖)이다. 현대의 실존주의 사상가로 그의 영향을 받 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흔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야스퍼스의 중요용어인 ‘단독자’ ‘예외자’는 그에게서 유래하며,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의 근본개 념인 ‘불안의무’는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에 서, ’존재와 시간‘에서의 ‘결단’ 강조는 그의 영향에 비롯된 것이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 이다‘라는 것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키에르케 고르의 주제였다. 카뮈의 「시지프스」나 「이방인」 등의 작품을 지배 하고 있는 부조리의 철학은 ‘불안’, ‘죽음에 이르는 병’ 속의 문제가 된 ‘악마적 광란’의 모습을 방불케 하는 것이다. 인문학의창 『 』 2014년 1월호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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