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법무사 7월호

일한 어두를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극복, 또는 넘어서고 싶었던 인상주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경직성, 단순성일 것이다. 어떤 면에서? 대상, 특히 자연을 보고 어떤 순간의 현상을 포착하는 방식에서일 것이다. 좀 더 단순하게 ‘빛’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달랐던 것일까?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는 명제의 허구성을 깨달은 것이 이들만은 아닐 것 이다. 객관적 진실이란 있을 수 없고, 관찰자(화가)의 시각, 시간, 주위에 따라 대상 은 다르게 보인다. 어떻게 보면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행위의 부조리성은 ‘보이는 대로’ 그린다는 측면과 정확하게 반대되면서도 상당히 많이 겹친다. 절대(絶代)와 초월(超越), 존재(存在)의 본질(本質), 실체(實體)를 추구해 왔던 중세(中世)의 세계관이 르네상 스(Renaissance)를 거쳐 인간화, 세속화를 가속하면서 상대(相對)와 실존(實存), 현존재(Dasein : 하이데거의 표현이며 훨씬 후에 나온 개념이지만 편의상 설명어로 차용한다)로서의 인간의 속성, 현상(現象)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회(轉回)되어 온 것이 19세기의 가장 큰 의식의 흐름일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모든 예술사와 사상 사와 문화사가 이렇게 설명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똑같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와 닿는 대로, 그 인상을 끄집어내서 표현한다, 인상적으로 그린다 는 것이 인상주의자들의 모토(motto)였을 것이다. 인간 중심의 세계관이 맞이한 주체(主體)성의 개화이다. 그 래서 이들은 실내보다는 야외에서, 풍광에 따라 달라지는 건축물, 다리, 물(水), 하늘, 숲과 인물(들)을 그렸다. 그런데, 1886년의 마지막 전시회 이후 이러한 인상주의의 ‘자연스러운’이라는 시각에 반발하며 이른바, 신 인상주의, 고흐와 세잔, 로트렉 등의 개인적 실험주의자들과 종합주의를 표방한 고갱 및 나비파 등이 출현한 다. 이들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인상주의라는 슬로건에서 조금씩 각자 다르게 분파한 것이지만, 큰 시각에 서는 이들 역시 인상주의의 아들들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피카소나 마티스, 달리 등 전혀 다른 화풍이 나오기까지 이들의 표현 양식은 다양하면서도 하나의 큰 줄기로 읽을 수 있다. 그 대부분의 작품이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것이 바로 프랑스의, 파리의 자 부심인 것이다. 모네를 존경한 세잔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모네는 시력이 한쪽밖에 없다. 하지만 이 얼마 나 뛰어난 시력인가!” 모네의 대표 걸작 「양산 쓴 여인」 최초 공개 필자가 어떻게 개개의 작품을 설명하겠는가. 이는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다. 다만, 불행한 삶을 살았어도 세 대를 넘어 우리에게 영감을 준 위대한 화가들의 그림과 조소 작품을 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관람을 권한다. 모 네의 대표적인 걸작 「양산 쓴 여인」이 국내 최초 공개되었다는 것과 여인들의 빗, 분첩, 장신구, 화병 등 19세 기 후반 제작된 오브제를 통해 당시 파리여인들의 생활사를 엿볼 수 있는 것, 파리의 만국박람회(바로 ‘엑스포 (EXPO)’의 전신)를 맞아 지어진 에펠탑의 건축 과정을 스케치로 접할 수 있는 것도 이번 전시회의 매력이다. 도록에 인용된 카를린 마티유의 글에서 마지막 한 구절을 발췌해 옮겨 본다. “인상주의는 다음 세대에게 주제에서 해방될 수 있는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자유롭게 색을 쓰고, 색의 농담 또한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 역시 인상주의가 남긴 유산이었다.” 73 문화가 산책 ● 미술 ● 관람 장소 및 일정 :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2014. 5. 3. ~ 8. 31. ● 전시 문의 : 02) 325-10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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