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법무사 12월호

인문학의창 ▶ 실존주의 철학(7-①) 구체성을 띤 개인적인 인간의 운명에 관해서는 무관 심하였다. ‘내’가 여기에 지금 생존하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 로 이해하고 있을 때, 나의 처지와 관계되는 모든 것 은 새로운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 ‘내’가 바 로 특수한 도시나 지방, 그리고 독특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출생했다는 것 등은 결정적인 사실로써 실존 적으로만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이때 마르셀은 그 의 실존의 의미를 명백히 하기 위한 전제로 객체와 구별한다. 객체는 나와 아무런 내면적인 관련성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내가 그것을 응시하거나 말거나, 내가 그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거나 말거나 그 자신 의 본질은 변함이 없이 여전히 있는 그대로인 것이 다. 환언하면, 그 객체는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 도 아니고, 내가 그 객체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도 아 니다. 객체는 ‘나’라는 개체와 유리되어 있는 것으로 그 속에 ‘나’에 대한 고려는 들어있지 않다. 마르셀에 의하면, 이것이 과학적 분석의 태도요, 우리의 원초적인 직접경험을 객관화한 ‘제1차적 반 성’ 즉, 과학적 반성의 소치라 한다. 이러한 태도는 비인간적인 사유(思惟)의 방식이요, 여기에서는 모 든 것이 기술에 의하여 지배되며 숫자적으로 따지게 된다. 이러한 과학적 범주 속에서는 실존적인 주체 는 몰각되어 있다. 그러나, 나만이 가진 나의 사랑, 하느님과 나와의 영교(靈交), 이러한 독자적 가치를 어떻게 과학적인 말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내면적이고 직접 적인 경험은 그것을 과학적으로 반성하자마자, 완전 히 산산조각이 난다. 객관적인 견지에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향외적 태도는 철학에서 수용함은 실로 무리인 것이다. 마 르셀은 이를 반대하고 추상적인 분석적 사유로 인하 여 파괴된 직접적 경험을 구체적이고 본래적인 자세 로 회복하려는 것이다. 비인격적 사유방식으로부터 제2차적 반성, 즉 철 학적 반성은 과학적 기술, 따라서 모든 객관적 지식 을 초월하여 원시적 통일을 가진 직접경험을 회복시 키는 것이며 여기에 실존이 문제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초월이란 마르셀에 의하면, 헤겔 의 변증법에 나오는 부정과는 다른 차원이다. 헤겔 의 부정의 부정은 논리적인 명사(名辭)를 정립(定立) 할 뿐이고, 새로운 실제성은 가져오지 못한다. 그러 나 철학적 반성에 있어서의 초월은 과학적으로는 증 명할 수 없는 실제를 드러낸다. 실존은 객체와는 반대로 객관적으로 정립할 수 없 고 개념화할 수도 없으며, 인식하기에 힘든 것이다. 따라서 알려고 할 때에는 오히려 놓칠 것이고, 오직 땅속을 파내려가듯 내적인 탐색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객관화할 수 없는 내면적 관련성(內面的 關聯性) 을 나에게 대하여 가진 여러 실제가 곧 나에게 실존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내면적인 관련성을 망각 하는 경우에 사람은 절망에 빠지고 말 것이다. 철학 적 반성이 관여하는 것은 언제나 실제적이며 인격적 인 존재요, 그것이 인격적 일수록 한층 실제적인 존 재이다. 마르셀의 ‘나는 실존한다’의 ‘나’는 데카르트의 ‘코 기토(Cogito)’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자아’도, 칸트의 ‘선험적인 자아’도 실제적 인 주체가 못된다. 일반적인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인식은 ‘기술적 인간’, ‘거리의 인간’, ‘일반적 인간’을 찬양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지식은 그러한 류(類)의 ‘세상사람’이 아닌 실존을 내면적 관련성에 있어서 해명하려는 것이다. 마르셀은 이 내면적 관련성을 해명하고자 우선 ‘나’와 ‘나의 신체’와의 관계에 착안하였다. 나의 신 체를 객관적인 과학적 태도로 보면, 나의 것이 아닌 타인의 신체모양으로 과학적 인식의 대상으로 될 수 『 』 2014년 12월호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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