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법무사 12월호
77 법무사의 서재 「둔황의 사랑」에서 윤후명은 혜초가 해로( 海路 )를 이용해 인도에 가 다시 육로로 중앙아시아 쿠차까지 여행하는 과정을 그린다. 패엽의 두루마리에 63,000자로 쓴 기행의 글을 모티브로, ‘사랑’이라는 의미를 그 뿌리까지 천착해 들어가며 혜초가 걸어간 구도의 길을 더욱 위대하게 되살려 놓는다. 녀’로 이름 붙어진 로울란의 목내이(미라)의 전설과 같은 이야기, 이런 갖가지 민담이나 설화에 관련된 풍성한 이야기들이 이 소설을 읽어가는 흥미를 한 층 더해 준다. 간절한 사랑의 기도, 폐허도 폐허가 아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어머니는 일본군의 정신대에 자원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왔지만, 일본군의 난 동으로 입은 상처 때문에 한쪽 다리를 자르고 의족 신세를 지고 살아간다. 어머니는 징용으로 중국에 끌려갔다 탈출한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한달음에 중국 장저커우(장가구)로 달려가지만, 미 처 도착하기도 전에 일본군에 쫓기던 아버지는 머 나먼 서역 땅으로 떠나 버린다. 어머니의 의족 가운데 뼈 뚜껑 속에는 아버지가 숨어서 쓴 작은 두루마리 속 글이 유품으로 남겨져 있었다. 독립군들이 가는 험난한 길에 대해 짧은 소 회를 담은 글이었다. “… 장부로 태어나서 어찌 하늘에 부끄러운 짓을 하리오. 삼위태백은 우뚝하여 만고에 변함이 없으니 뜻을 향하여 가는 이 몸 풍찬노숙에 더욱 굳세리라.” 사랑의 완성을 열망하는 주인공은 비천상의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둔황을 다시 찾는다. 사막을 지나 는 길은 만만치 많다. 중국 동진시대 명승(名僧) 법현(法顯 337~422 추정)은 이 길을 일컬어 “사하에는 악귀와 열풍이 심하여 이를 만나면 모두 죽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위로는 날아가는 새도 없고 아래로는 달리 는 짐승도 없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막막하고 어디 로 가야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 길을 가다가 언제 죽었는지 죽은 사람의 해골만이 길을 가리키 는 표지가 된다”고 탄식했다. 혜초 역시 이 땅에서 길을 잃었던지, “누가 고향 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는가. 빈 하늘에 흰 구름만 돌아가네.”라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시로 적었다. 주인공은 이제 이국여자 류 사오제와 사막의 땅에 서 살림을 차리리라고 결심한다. 사막의 오아시스 월아천(月牙泉) 가에서 천년에 한 번 꽃이 피는 양파 밭을 일구고, 낙타 고삐를 끌며 외롭게 숨어 살고자 한다. 그것은 두렵지만 간절한 그리움의 세계다. 그리움이란 멀리 있는 존재를 가까이하려는 것. 멀리 있는 존재자로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엄 청난 침묵, 위대한 고독, 끝없는 절대 속에서 깊고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지구에 혼자남 아 우주를, 가장 멀리 가서 가장 머나먼 자기 자신 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어딘가에 그 흔적을 남겨 놓아야 만 한다. 명사산 젊은 남녀들의 사랑이 영원히 식 지 않듯 폐허에서도 간절한 사랑의 기도를 드리는 한 그것은 폐허가 아니다. 둔황이나 로울란은 혜초 와 함께 지금도 우리들에게 당당하게 살아 존재하 고 있는 것이다. 뜻 모를 그 무엇이란 바로 오랜 기 도를 통해서만이 밝혀지는 진리, 그것이 바로 ‘사랑 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에서 출발해 엄청난 침묵, 위대한 고독, 끝없는 절대 속의 기도를 통해 그 길을 열 수 있다. 이것이 윤후명이 말하는 혜초의 구도정신인 것이 다. 소설에 소개되는 민담이나 설화는 이런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소설적 환유이며, 또 혜초를 통해 얻 고자 하는 다른 우주이며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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