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법무사 8월호
76 문화의 멋 • 공감 인문학 임진왜란의교훈, 『 징비록(懲毖錄) 』 류성룡과 『징비록』 『징비록』은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 발발 당시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이 기록한 임진왜란 전란사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일본, 명나라 사이에 치열하게 벌어졌던 외교전과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중들의 생활상, 그리고 전란 당시에 활약했던 이순신과 주요 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평가까지 임진왜란 당시 상황을 입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제목인 ‘징비(懲毖)’는 『시경(詩經)』의 주송(周頌), 소비 장(小毖章), “예기징 이비후환 豫基懲 而毖後患”, 즉 “내가 경계함은 후환을 삼가기 위함”이라는 구절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즉, 『징비록』 집필을 통해 다시는 같은 전쟁 을 겪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류성룡 사망 후 책장에 묻혀 있던 『징비록』은 1633년, 그의 넷째 아들 진이 간행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현 재 『징비록』은 안동의 하회종가(下回宗家)에 있는 친필 초 본과 이를 기초로 간행한 16권본과 2권본 등 세 가지 판 본이 존재한다. 류성룡은 중종 37년(1542), 외가가 있던 의성(義城)에서 태어났다. 유달리 총명했던 류성룡은 4세 때부터 글을 읽 었고, 6세 때 『대학』을 읽었으며, 16세에 향시에 급제한다. 21세 때 퇴계 이황을 만난 류성룡은 『근사록(近思錄)』 등을 배우며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는데, 이때 이황은 류성 룡을 가리켜 “하늘이 낸 사람이다. 훗날 반드시 큰일을 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류성룡은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사 로 관직을 시작했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에는 좌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하고 있었으며, 군부를 총괄하는 도체찰사 로서 이순신과 권율 등을 천거했다. 파천(播遷)을 떠난 선조를 호종하다가 개성에 이르러 영의정에 올랐으나, 평양에 이르러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했다. 서울수복 후 다시 영의정에 복직되어 훈련도 감을 설치, 군대를 정비했다. 정유재란 이듬해 북인들의 탄 류성룡의 『징비록 (懲毖錄)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이상진 법무사(서울중앙회)·본지 편집위원 / 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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