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법무사 8월호
77 법무사 2016년 8월호 핵을 받아 낙향, 조용히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이후 복관 되어 조정에서 수차례 불렀으나 일절 응하지 않았다. 『징비록』이 남긴 교훈 임진왜란은 섬나라의 오랑캐에까지 유린당했다는 분노 와 자괴감을 불러오거나 거꾸로 물리쳤다는 공허한 승리 감을 이끌기도 했으나, 어느 쪽도 정답은 아니었다. 류성룡 은 현실을 직시하는 길을 택했다. 조선이라는 좁은 틀 안 에서 보자면 임진왜란은 불의의 일격이겠지만 당시의 국 제정세로 보면 예고된 전란이나 마찬가지였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바로 그러한 점에 초점을 맞추 고 있다. 그 뻔한 상황을 예측하지 못하고 전란이 터지자 허둥대다 패배를 거듭한 현실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책으 로서는 보기 드물게 『징비록』이 대한민국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높다는 뜻일 것이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에 국정을 담당한 최고위층 관 리였던 만큼 그가 취택한 정보는 상당히 정확하고 깊이가 있는 고급정보여서 여느 기록물과는 달랐다. 그는 전란의 한복판에서 누구보다 현명하고 신중하게 대처법을 찾은 사람이었다. 그가 벼슬을 물리고 나와 그 일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죄상을 드러낸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숙연해지 지 않을 수 없다. 『징비록』을통해본임진왜란 전쟁 발발 전 조선과 일본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조선왕조는 사림과 훈구파의 정쟁으로 무오사화, 기묘사화 등 피비린내 나는 사화들이 빈발하는 등 극심한 정치사회적 혼란을 겪는다. 반면, 일본은 1543년마카오를향해가던배한척이일본 규슈 남쪽에 위치한 다네가시마에 표류하면서 영주에게 선 물한 서양식 소총 하나를 시발로 해서 얼마 후 조총의 대량 생산체계를만들고곧총을든보병위주로군대를재편하는 등 빠른 변화를 겪는다. 게다가 세계에서 두 번째 은 생산국 가로 발돋움하면서 포르투갈, 스페인과의 접촉을 통해 국제 감각까지 익혀 간다. 이런 과정에서 전국시대 통일의 마지막 단추를채운인물이바로 ‘도요토미히데요시’였던것이다. 이순신과 명의 속셈 1592년 4월 13일, 왜군은 부산진에 상륙해 빠르게 북 상한다. 그리고 4월 30일, 동대문 밖까지 올라온다. 서울 에서 부산까지 428km를 불과 17일 만에 주파한 것이다. 일본군은 순식간에 평양까지 올라왔고,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부대는 두만강까지 올라가 6개월 만에 한반도 대 부분이 유린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럼에도 조선은 잘 버텨 냈는데, 그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이순신이다. 류성룡이 정읍 현감 이순신을 7단계나 뛰어넘는 기상천외의 발탁으로 전라좌도 우군절 도사로 추천한 것이 1591년 2월, 왜란이 터지기 불과 14 개월 전이었다. 『징비록』에서 수군장수로서는 초보였던 이 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된 뒤 수군지휘관으로 완벽하게 변 신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순신과 의병의 활약으로 조선의 반격이 시작된 후 명 나라 군대가 들어온다. 1592년 12월 이여송이 지휘하는 5만 1000여 명의 대군은 의주로 투입된다. 당시 명나라는 세계 최강국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한반도가 일본 수중에 떨어지고 그 일본군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온다면 끝없 이 펼쳐진 만주 땅을 방어하는 데 100만 명 이상의 병력 을 동원해야 할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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