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법무사 8월호

78 문화의 멋 • 공감 인문학 명은 면적도 좁고 국토의 7할 이상이 산악지역인 조선 에서 일본군을 상대함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국 전쟁 당시 마오쩌둥이 한반도에 군대를 보낸 이유와 무관 하지 않다. 중국의 시각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차이가 없 다. 한반도의 절반 정도만 진공상태로 남겨 두면 자신들 본토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별문제가 없다는 속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죽을 지경에 이른다. 『징비록』은 독자적인 방어능력이 없는 나라가 타국에 의지해 전쟁을 치를 때 겪을 수밖에 없는 비애와 상처가 적나라하게 기 록되어 있다. 1593년 4월, 명나라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잠정적인 합의를 하고 심유경이 조선에 일방 적인 통보를 한다. “일본군이 서쪽, 남쪽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일본군이 한강을 건너가기를 기다리고 있던 조선군은 명나라 군사가 몰려 나와 조선군을 막고 일본군을 호위하 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목도한다. 또, 심유경은 동남 연해 지역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에게 이른바 ‘심유경표첩’이라 는 통행증을 발급한 뒤, 조선군에게 표첩을 소지한 일본 군은 공격하지 말라고 요구하기까지 한다. 어느 순간 조선군을 움직일 수 있는 작전권이 명군에 게 넘어가 버렸고, 조선은 할 말을 잃었다. 시간이 갈수록 조선 백성의 고통과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결국 이 강화를 통해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음을 깨달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7년 1월, 한반도라도 차지하겠다고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데, 바로 ‘정유재란’이다. 류성룡의끝나지않은고민 벽제관전투 이후 임진왜란은 기존의 동아시아 패권국가 인 명과 신흥강국 일본 사이의 전쟁으로 전개된다. 류성룡 은 조선의 전쟁 때문에 노심초사한다. 임진왜란은 왜의 입 장에서 보나 명의 입장에서 보나 ‘조선분할전쟁’이었다. 왜 는 그들 말로 ‘조선할지(割地) 전쟁’이었고, 명은 한강 이남 에서 막아 북쪽 4도를 지킴으로써 요동(遼東) 방어의 울 타리로 삼는 ‘조선울타리’ 방어전쟁이었다. 류성룡은 두 개의 전쟁을 함께 치러 냈다. 하나는 명과 왜의 4년에 걸친 물밑 강화협상을 통한 ‘분할저지전쟁’이 었고 다른 하나는 ‘군량전쟁’이었다. 그는 단순히 전쟁을 수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을 회복시켜 다시는 침략받지 않는 나라로 만들 방 법을 고민한다. 『징비록』에는 ‘자주국가’를 염원했던 그의 비전이 담겨 있다. 조총과 대포, 병법을 비롯한 일본과 명 의 선진무기와 군사기예를 배우는 것, 전쟁에 지치고 시달 렸던 백성들을 보듬는 것, 유사시에 활용할 수 있는 인재 를 선발하여 기르는 것 등 ‘전쟁 이후’를 대비한 구체적인 대안이 조목조목 제시되어 있다. 류성룡이 남긴 업적 가운데 하나는 조선 후기 군제 기 반인 ‘훈련도감’을 창건한 것이다. 그는 양국의 활약을 보 면서 직업군인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더 나아가 전쟁으로 피해를 본 나라가 회복하려면 무역이나 통상을 강조해 상 업적인 마인드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징비록』에 담긴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대비 한다는 류성룡의 정신은 계승되었던가. 그렇지 않다.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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