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사원보다 인기 있었던 법원서기보 지난 호에서 주명식 법무사가 말한 것처럼 1960년대 법원서기보시험은 비록 법원 말단 공무원시험이긴 했 지만, 중·고등학교 교사나 행정부의 계장 이상 공무원들 도 도전할 정도로 인기 있는 시험이었다. 이 시험에 합 격하면 결혼 상대자로서 대기업 사원보다 좋은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특히 인기가 높았다. 1961년, 필자는 당시 미국 국적의 한 회사에 근무하던 중 법원서기보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는데, 그 소문이 필 자가 다니던 회사는 물론이고, 회사가 있던 반도호텔(서 울 을지로입구) 2층의 인근 사무실에까지 삽시간에 퍼져 서 많은 부러움과 축복을 한 몸에 받았던 기억이 난다. 1961년 임용시험에서 모두 18명이 합격했는데, 수석 합격자였던 김용제 법무사(현재는 폐업)는 곧바로 법원 서기로 임명되는 혜택도 받았다. 북한의 개성지원이 서울지방법원 산하? 필자의 첫 발령지는 서울지방법원 철원지원이었다. 1962년 「법원조직법」을 개정하면서 지금은 없어졌지 만, 당시 경기도 파주의 구등기소 자리에는 개성지원이, 철원등기소 자리에는 철원지원이 있었다. 이때는 수원 지방법원조차 서울지방법원의 단독지원이었는데, 응당 북한에 있어야 할 개성지원이 단독지원으로 파주에 있 었고, 소도시인 철원에 지원이 있었다는 것은 지금으로 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시 철원지원에는 판사인 지원장 외에 13명의 직원 이 있었는데, 이 중 9명이 임시직원이었다. 처음 시작 한 공직생활, 첫 근무지에 들어서 잔뜩 긴장해 있는 필 자에게 연세가 지긋했던 지원장님이 마치 친할아버지 처럼 따뜻하게 맞아주었던 기억, 그리고 옆 건물의 검 찰 지청장님이 “지원장님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반가워 요”라며 환대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시대의 청년들은 생소한 감정일 수 있겠지만, 권 위주의 시대였던 당시에는 ‘말단 공무원인 서기보 따위 가 감히 판사와 검사 어르신들에게 이토록 융숭한 대접 을 받다니’ 하며 무척 기분이 좋았던 기억도 난다. 더군 다나 철원지원에서 하숙집까지 미리 구해놓는 등 많은 지원을 해줘 더욱 고마운 마음이었다. 당시 법원은 관 공서라기보다는 훈훈한 인정이 오가는 가정집 같은 분 위기였다. 담뱃갑 셀룰로이드 껍질의 화려한 변신 1963년이 되자 필자의 발령처가 바뀌었다. 서울지방 법원 형사과에서 판결문을 정서하는 업무에 배치된 것 이다. 당시는 컴퓨터는커녕 타자기도 없던 시대여서 수 많은 법원 서류와 공문들을 직접 손으로 정서해 만들었 다. 판결문도 필자와 같은 담당 법원서기가 하늘하늘한 습자지를 3장씩 겹친 다음 먹지를 깔고 꾹꾹 눌러써 복 사했다. 그런데 유리로 된 펜촉이 너무 조잡해 판결 용지가 자꾸 찢어졌다. 짜증이 난 필자는 머리를 짜내 잘 찢기 지 않을 묘책을 하나 발견했다. 바로 담뱃갑의 셀룰로 이드 껍질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셀룰로이드 껍질을 벗겨내 판결용지 위에 평평히 깐 다음 조심스럽게 꾹꾹 눌러 복사하면 판결용지가 찢어지는 법 없이 기똥차게 정서가 잘 되었다. 이 방법은 곧 다른 주임들에게도 퍼 져나가 한동안 내부의 귀중한 노하우로 전수되었다. 그 런데 몇 장의 복사본은 이런 식으로 처리하면 됐지만, 여러 통의 판결문이 필요할 때는 하는 수 없이 등사판 으로 판결문을 작성해야 했다. 등사판 등사는 활자 인쇄를 대신해 일제강점기 때부 터 이어진 저렴하고 신속한 대량인쇄법으로 널리 애용 85 법무사 201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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