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법무사 2월호

되었다. 밀랍을 먹인 원지에 철필로 글자를 긁은 후 원판 을 실크스크린 아래 넣고 기름잉크를 묻힌 롤러를 위에 서 밀착시켜 밀어내면 복사본이 등사되었다. 당시 등사 기구는 법원과 같은 관공서는 물론이고, 모든 기관과 단 체에서 대량인쇄용으로 구비하고 있던 필수품이었다. 필자가 판결문 정서 업무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 은 바로 악필 판사들의 판결문을 정서하는 일이었다. 제멋대로 휙휙 갈겨쓴 판결문 초고가 넘어오면 이를 해 독하지 못해 쩔쩔매다가 하는 수 없이 원로 계장들에게 문의를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일류대학 나온 놈이 그것도 모르냐”는 핀잔뿐.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추억이 되었지만, 당시는 그런 일이 큰 수모로 느껴졌다. 선배가 지갑 여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 1960년도 후반, 필자는 법원주사로서 법원행정처 총 무과에 재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우리 부서는 대구지 방법원 관내 사무감사를 위해 국장을 단장으로 하는 감사팀을 꾸려 대구로 내려갔다. 그런데 대구 인근에 이 르자 교통경찰까지 동원된 대구지방법원 환영단이 나 와 영접을 했다. 물론 미리 감사일정을 예고했지만, 경찰까지 동원해 도시외각으로 나와 영접을 한다는 것은 상상 밖의 환대 였다. 이런 상황에 익숙지 않았던 필자는, 순간 꽤나 중 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미국회사를 정리하고 법원으로 들어온 것이 옳은 결정이었다며 우쭐해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우쭐함은 비단 필자만의 일은 아니어서 당시 서 울에서 대전지방법원으로 발령받아 내려갔던 계장 한 사람은 자신이 대전역에 내리자 경찰관이 미리 대기하 고 있다가 법원까지 호위를 해주더라며 자랑삼아 말한 적도 있었다. 일개 법원 직원이 그런 과분한 대접을 받 았으니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안 될 일이다. 한편, 당시 법원은 상급자가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래서 재판기일에는 판사가 점심값을 계산했고, 그것이 당연한 문화였다. 그뿐만 아니라 직 원의 수가 적은 지원 같은 곳에서는 점심시간에 식당에 서 우연히 상급자나 상사와 마주치면 당연히 선배가 카 운터 앞에서 “오늘 점심은 내가...”라고 소리치며 지갑을 열었다. 간혹 이런 불문율을 어기는 계장이나 고참 선배 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오래도록 후배들의 뒷담화에서 ‘쫌생이’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유태흥 전 대법원장님에 대한 추억 필자가 모신 분 가운데 이미 작고하신 고 유태흥 전 대법원장 같은 분은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군사 정권의 압력을 몸으로 막아내며 노력하셨던 인간적이 었던 분으로 기억한다. 이분은 청렴하고 청빈한 분이셨다. 필자는 그 어른을 서울 형사지방법원 수석부장 시절에 모셨는데 사리도 매우 분명했다. 재산이라고는 전 서울 서대문 구치소 건 너편 행촌동 급경사지에 소재한 허름하고 조그마한 이 층집뿐이었다. 사모님이 40대 초반에 돌아가셔서 늘 혼자였다. 그 래서였을까.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무척 즐기셨다. 그 리고 자신이 그러했듯 특히 지나친 아부성 접근을 몹시 경계하셨다. 그 어른이 퇴임하시고 행촌동 자택으로 돌아오신 후 그 이전처럼 손바닥만 한 2층 좁은 방에 기거하시면서 “이렇게 정스럽고 아담한 거처가 또 어디 있단 말이여!” 이렇게 매우 만족해하셨다. 노모님이 세탁하느라 고생하실까 봐 겨울 내내 세탁 하지 않은 한복을 그대로 입고 계시면서도 늘 떳떳해 86 법조, 그땐 그랬지 문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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