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법무사 2월호

는, 어느 날 그런 욕망에 갇힌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는 아버지의 은화를 훔쳐 몽땅 버찌를 산 후 ‘목구멍이 미어 지도록 처넣어 다신 버찌 생각이 안 나도록’ 해버렸다. 그리고 스무 살 청년 때 조르바의 ‘자유 영혼’은 ‘가출’ 이라는 첫 테이프를 끊는다. 동네에 온 산투르 악사의 연주를 듣고 산투르에 푹 빠졌다. 그길로 결혼자금을 챙 겨 그 악사를 따라 줄행랑을 놓았다. 산투르에 미친 그 는 광산을 떠돌며 수련을 계속했다. 어쩌다 결혼을 했고, 딸을 하나 두었지만 다시 가출하 고 만다. 그 또한 산투르 때문이었다. ‘산투르를 치려면 환 경이 좋아야, 마음이 깨끗해야, 온갖 정성을 쏟아야 하 는데 가족의 생계에 갇히니 그게 어려웠다. 그래서 가족을 등져버렸’던 것이다(나중에 이야기하 겠지만 한국에 사는 우리는 이 부분에서 ‘자유’를 찾아 훌쩍 떠나기란 거의 어렵다). 우리가 늘 부러워하는 ‘자유 로운 영혼’의 전제조건은 ‘몰입’인 것이다. 조르바의 첫째 덕목이다. 그의 몰입 정도는 왼손 집게손가락을 스스로 손도끼 로 내리쳤을 만큼 지독하다. 도자기는 예술적 창조다. 창 조는 예술가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 진흙을 올리고 녹로를 돌리는데 그 손가락이 자꾸 창조 중이던 도자기 를 짓뭉갰다. 화가 치민 그는 그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나도 사람이다. 아팠다.”고 진술했다. 예술도 일도 사랑도 그는 아프도록 몰입했고, 늘 목숨 을 걸었다. 이것이 ‘자유로운 영혼’의 본모습이다. 그는 오직 ‘인간’인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다. 거기에 걸리적거 리면 신과 그의 계율이라도 무시했다. “신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구 원해야 한다”고 큰소리 쳤던 이 사내는 ‘인간’의 편에서 신과 맞짱을 떴다. 나는 50대 중반 맞벌이 부부의 남편이다. 아내와 나 는 아직도 수시로 싸운다. 이번 주에만 다섯 번 부딪쳤 다. 우리는 3분 이상 대화를 지속하면 안 된다. 냉장고 먹거리와 유통기한의 해석, 설거지 하는 방식과 순서, 음주 퇴근, 끽연 등등 싸울 거리는 도처에 널렸다. 지난가을에는 베란다 빨래가 갑작스러운 비로 습기를 먹었다. 아내는 “비가 오는데 뭐 하고 있었냐” 소리쳤다. 나는 “비가 온다고 보고하고 오냐, 어쩌라는 거냐”고 받 았다. 빨래를 거실로 옮기고 선풍기를 돌리라 했다. 부아 가 났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아이들이라고 아버지 대우 를 제대로 해주는가? ‘이것들이 정말 내가 확 집을 나가 봐야 정신을 차릴 건가’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난 결코 그리하기 어렵다. 내게는 ‘가족을 사랑 해야 하는 남편, 아버지의 관습’이 찰싹 달라붙어 있다. 난 조르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목숨 걸고 등산 배낭을 챙겨 집을 나와 버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산정에 이르면 ‘반드시’ 챙겨간 소주 한 잔 마시며 발아래 세상을 굽어본다. 또 한 잔 마시며 저 푸른 창공을 올려다본다. 성냥갑 같은 인간계가 가소롭다. 창공을 박차고 날아 오르며 조르바의 삶을 부유한다. ‘언젠가는 산속에서 홀로 사는 자연인이 되고 말 거야’ 외친다. 그러다 시계 를 보며 화들짝 놀란다. ‘어이쿠, 이러다 저녁밥 시간 늦 을라. 그럼 또 혼날 텐데……’ 하산을 서두른다. 속절없이 조르바 따라 ‘자유로운 영혼’ 흉내 냈다가는 주말에 밥도 제대로 얻어먹기 힘들어진다. 책은 책, 삶 은 삶이다. 조르바의 ‘몰입’은 배우되 ‘가출’은 버리는 것 이 내가 살길이다. 조르바의 몰입은 배우되 가출은 버리라~ 89 법무사 201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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