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 규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개인을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광경은 오늘날 정치적 공론 시장에서도 심각하게 나 타난다. 우리 사회는 오랜 세월 동안 분단에 갇혀 이념적 이분법이 고착되어왔다. 세 상에는 ‘좌’ 아니면 ‘우’밖에 없다는 생각이 득세했고,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생각 으로 연결되었다. 수많은 인간들이 갖고 있는 수많은 생각들은, 둘 가운데 하나로 분 류되고 만다. 그 앞에서 인간의 다원성은 설 곳이 없다. 모든 인간을 둘 가운데 하나로 나누려는 폭력성도 문제이지만, 정체성의 선택에 대 한 강요 또한 심각하다. 당신은 어느 편인가, 보수인가 진보인가, 여당 편인가 야당 편인 가,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하는 이런 질문들이 익숙해진 지도 오래이다. 하지만 개인들이 저마다 고유하게 갖고 있는 정치적 사고를 어떻게 이것 아니면 저 것, ‘이쪽 편 아니면 저쪽 편’ 식으로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생각은 둘 가운데 하나를 강요받을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 이런 질문이 폭력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정체성에 대한 고백을 강요하고 있다는 사 실이다. 질문의 대전제는 누구나 하나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정체성을 타인 앞에서 진술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의 정체성 혹은 이념을 물어왔을 때, 그런 질문에 답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익숙해졌고 주눅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으로서 나의 권리를 내려놓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럴 의 무가 없다. 답변하고 말고는 나의 자유이다. 나에게는 답변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그래서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Jacques Derrida)는 개인이 어떠한 정체성도 갖지 않 을 권리를 말했다. 그는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권리 중 하나로 ‘답변하지 않을 권리’를 꼽는다. 민주주의에서는 누구에게나 답변의 권리, 반론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동시에 답변하지 않을 권리도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답변하지 않을 권리’란 법적인 문제에서 불리한 진술을 거부하거나 침묵할 수 있는 권리 같은 특수하고 제한된 권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답변하지 않을 권 리’란 그에 앞서 어떤 정체성을 갖지 않을 권리, 나에게 강요되는 정체성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이것은 아무런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을 권리, 익명적인 누군가로 존재할 권리, 비밀을 지닌 존재자로 살아갈 권리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데리다는 또한 “나는 가족의 일원이 아니다(je ne suis pas de la famille)”라고 말한다. 데리다는 “나를 ‘당신들 중 하나’로 간주하지 말라, ‘나를 당신들 가운데 하나로 셈하지 말라’, 나는 항상 나의 자유를 유지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가족의 일원일 때 그가 무리 속에서 자신을 잃고 말 것을 우려한다. 문화의 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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