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전업무? 잘하면 그만, 못하면 꾸중 1967년 대학 졸업 후 큰 뜻을 품고 응시했던 제7회 사 법시험을 시작으로 7년에 걸쳐 1차 합격, 2차 불합격을 연속하던 필자는 나이도 들고 위장병에 제11회 시험에 서 1차조차 떨어지게 되자 1974년, 법원공무원시험에 응 시해 그해 10월에 법원서기보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필자의 첫 발령지는 법원행정처 총무과, 맡은 일은 의전담당관 보조였다. 직급은 ‘법원서기보 시보’. 이 직 급은 나중에 ‘주임’ 또는 ‘실무관’으로 바뀌었지만, 당시 에는 공식적으로 ‘의전담당 보조’, ‘3단독보조’라는 그다 지 좋지 않은 명칭으로 불렸다. 의전시보는 ‘의전’이라는 그럴듯한 말과는 달리 사법 부 요인 간부들의 온갖 잡다한 수발을 드는 일이 주된 업무였다. 예를 들면, 사법부 간부들이 국경일 등 국가 행사에 참석할 경우 주최측과 연락해 참석자 명단을 작 성하거나 비표수령, 좌석확인 등의 일을 하고, 해외여행 이 있을 경우 여권과 비자 발급·수령 및 여행일정, 호텔 예약, 공항 출입국 등의 사무를 처리하는 일이다. 특히 각국의 대법원장, 대법관 등이 참석하는 대법원 주체의 국제행사가 열리면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쳐가며 기획과 진행, 외부인사 영접, 공항의전 등에 만전을 기 해야 했다. 여기에 축하공연까지 끼게 될 때는 더욱더 복잡하고 잡다한 업무들이 밀려왔고, 이를 빈틈없이 처 리해내기 위해 의전담당관과 필자는 국경일과 현충일 등의 빨간 날에도 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의전업무는 잘하면 그만이고 못하면 꾸중을 듣는, 그야말로 3D업무라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일에 대한 만족도가 높을 수가 없었다. 법학을 전공한 필자 가 법률 실무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을 잘 해내려니 더욱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한편, 필자가 담당한 업무 중 ‘의전’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당직순서를 짜는 일이었다. 정해진 순번대로 순서를 짜서 알려주기만 하면 되니까 처음에는 세상에서 가장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만인이 불평하지 않는 당직순서를 짜는 일은 사실 신기 에 가까웠다. 특히 기독교인과 등산 마니아들이 일요일 당직에 걸 리기라도 하면 뒤통수에 걸리는 온갖 따가운 불평들 을 감내해야만 했다. 사무치고는 아주 고약한 사무였 고, 세상에서 가장 골치 아픈 일이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서에 신참이 들어오면 번개처럼 그 일부터 떠넘겼다. 그해 입사한 필자가 그 불운의 주인공 이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대법원장 연설문 못잖게 어려웠던 장례식 조사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힘들었지만 성취감을 느꼈던 일도 있었다. 우연히 법원행정처장의 연설문을 작성했다가 나름 실력을 인정받아 대법원장의 연설문 초안을 작성하는 업무까지 맡게 된 것이다. 당시 대법원장이 참석하는 웬만한 행사의 연설문 초 안은 필자가 담당했는데, 지금도 1979년 주재황 전 대 법원 판사의 수원지방법원 청사 준공식 치사 초안을 작 성하고, 총무과장과 함께 크게 칭찬을 받았던 일을 떠 올리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하지만 행사는 왜 그리도 많았던지 꼭 없는 집 제사 돌아오듯 했다. 당시는 컴퓨터도 없던 때라 연설문 한 편 쓸 때마다 도서관을 뒤지고, 관계 전문가와 학자, 교 수 등을 찾아가 물어보면서 겨우 완성해 놓고 돌아서면 다시 다음 연설이 기다리고 있는 식이었다. 연설문 작성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장례식 조사였 다. 대개는 보통 3일장이 통례이므로 부음을 받은 후 이 틀 안에 그럴듯한 조사 한 편을 작성해야 했다. 부음을 받자마자 필자는 인사과로 달려가 고인에 관한 기록을 87 법무사 201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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