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대목에서 ‘책보기’가 트레이드마크인 필자에게 누 가 ‘인큐네뷸러’에 해당될 책을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몹시 궁색해졌다. 사실 고서 수집이 취미도 아니 고, 또 그럴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지도 않은 필자 가 소장 중인 책들은 대부분 1982년 대학생이 된 이후 산 것들이다. 100년은 고사하고 기껏해야 40년에 불과 한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서가를 유심히 둘러보았 다.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출판된 두 권의 에 세이집이 눈에 쏙 들어왔다. 숭실대학교에서 철학을 가 르치셨던 고(故) 안병욱 교수의 『마지막 등불이 꺼지기 전에』와 연세대에서 철학을 가르치셨던 김형석 교수의 『하늘의 별처럼 들의 꽃처럼』이었다. 아! 감수성 예민했던 청소년기에 객지의 자취생이 대 학입시의 부담감으로 좌절을 겪을 때마다 읽고 또 읽으 며 힘과 용기를 얻었던 책 두 권이 그때 그 모습대로 서 가에 꽂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두 권을 ‘나의 인큐 네뷸러’로 치기로 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두 분 저자를 잊었다. 그런데 유난 히 습하고 더웠던 2016년 여름, 한 줄기 시원한 바람처 럼 뉴스가 떴다. 당시 97세의 김형석 교수께서 『백년을 살아보니』란 에세이집을 출판했다는 것이다. 여러 이유 로 정말 놀랐다. 청소년기의 우상이었던 김형석 교수가 아직 살아 계 신다는 것, 97세에 이르러 책을 내셨다는 것, 실제로 인 생 백 년의 지점에 도달해서야 깨치게 된 ‘삶의 엑기스 같은 지혜’가 들어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 등이었다. 정 말이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책을 주문했다. ‘행복, 결혼과 가정, 우정과 종교, 돈과 성공/명예, 노 년의 삶’으로 이어지는 백 세 철학자의 경험과 깨달음은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필자는 아직 육십에 이르지 못했다. 누군가가 인생의 황금기가 언제였는지 물으면 늘 20대 때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백 년을 살아본 사람은 인생의 황금기가 언제라 고 생각할까? 놀랍게도 60세에서 75세까지란다. “정신 적 성장과 인간적 성숙을 위한 노력-에는 꾸준한 독서 도 포함돼 있다-을 계속할 경우 그렇다”며 조곤조곤 속 삭이는 가르침에 끝내 유쾌한 웃음이 터졌다. 책을 읽다 말고 방에서 일어나 펄쩍펄쩍 뛰며 돌았다. 진짜 그랬다. ‘내게는 아직 인생의 황금기가 시작되지도 않았구나, 앞으로도 7년이나 더 황금기를 준비할 시간 이 남아 있구나, 그렇다면 내가 뭘 두려워할 것이며, 뭘 못 해낼 것이냐’는 희열이 필자를 벌떡 일으켜 세웠던 것이다. 당시 97세의 저자는 얼마나 더 오래 살고 싶다고 했 을까? 답은 숫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행복하게, 이웃에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을 때까지’ 살고 싶다고 했다. ‘백 년을 살아보니’ 인생이란 것이 그리도 소박한 것이었 다는 것이 철학자 어르신의 ‘엑기스’였던 것! 50대 중반에 다가서도록 ‘가족과 나’에 얽매여 허덕 이던 필자에게 어르신께서는 또 하나 큰 가르침을 주셨 다. 필자는 생각에 여유를 찾았고, 삶은 느긋해졌다. “제가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 90년 넘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아오면서도 그 사실을 외면하고 살았습니다. 다시 한 번 교단에 설 수 있다면 정성껏 제자들을 위하고 사랑 해 주고 싶습니다.” ‘백 년을 살아보니’ 인생은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아 니었던 것이다. “사랑이 있는 고생이 곧 행복” 91 법무사 201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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