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한 세자로 만들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기대에 어긋난 사도세자의 모습에 영조는 거듭 책망을 하고 그럴수록 사도 세자는 강박증에 사로잡혀 제정신을 잃는 지경에 처하게 되어, 결국 뒤주에 갇혀 죽게 된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향해 “넌 네 존재 자체가 역모야!”라고까지 하며 아들의 자존 감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나는 그리 살고 싶지도 않고, 살 수도 없소”라고 외치며 아버지의 강압을 거부한다. 아버지가 아닌 자기의 삶을 살고자 하는 절규였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욕망은 진정 나의 것인가. 타인들의 시선 을 의식해, 타인들의 욕망을 대신 부여잡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진정으로 원 했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지금 내가 매달려 있는 욕망이 나의 내면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 앞에서, 내 삶의 불공정함과 부당함과 비극이 생겨난다. 타자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나는 내 삶의 주인이 아닌 것이다. 어 떻게 해야 우리는 타인의 삶이 아닌 나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우리 자식들의 경우도 그러하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 랑 속에는 다시 살아난 부모의 나르시시즘이 있음을 간파한다. 아이는 부모가 이루 지 못한 꿈을 이뤄야 한다. 사내아이는 자기 아버지를 대신하여 위대한 사람이 되고 영웅이 되어야 하며, 계집아이는 어머니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뒤늦은 보상이지만 잘생긴 왕자와 결혼하여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현실의 압박을 심하게 받아 자아가 위협받는 부모의 나르시시즘이 자 식에게서 피난처를 찾아 안정된 위치를 유지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감동적이기는 하 지만 근본적으로는 유치한 속성을 지닌 부모의 사랑이란, 결국 부모의 나르시시즘을 자식이라는 대상에게 그대로 내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바로 오늘 우리들의 얘기다. 부모들은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아이들을 통해 실현 하려 한다. 어느 사이 아이들은 아버지가 혹은 어머니가 이루지 못했던 꿈을 대신 이 루려고 나서는 존재가 되고 만다. 그리하여 아이들의 욕망은 다름 아닌 타자로서 부 모의 욕망이다. 우리 아이들로 하여금 부모의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할 책 임을 우리는 갖고 있다. 나도, 나의 자식들도 자신의 얼굴을 갖고 살 수 있도록 하자.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부모의 삶을 대신 살아야 하는 우리 아이들은 과연 행복할까. 83 법무사 2018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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