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1953년 열일곱 나이에 빨치산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결혼을 서두르는 부모에게 떠밀려 옆 마을 청 년과 결혼했다. 남편은 가부장제 아래의 ‘첩, 가출, 도박, 무책임’의 전형이었기에 오롯이 그녀의 힘과 의지로 3 남 2녀를 키우고 교육시켰다. 고학으로 자수성가한 장남, 작가로 성공한 장녀, 약사 가 된 차녀 모두 수도 서울에서 먹고살 만한 중산층으 로 성공했다. 엄마는 젊어 그리 속을 썩였던 남편과 둘 이 시골에서 살았다. 자식들은 처음에는 나름 정성껏 부모를 챙겼으나 시간이 갈수록 무뎌졌다. 각자 챙겨드 리던 생일도 어느 순간 아버지 생일 한 날로 통일됐다. 그도 처음에는 자식들이 귀향했지만, 나중에는 바쁜 자식들을 위해 부모가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그러다 지 하철 서울역에서 엄마는 남편의 손을 놓쳐 그만 엄동설 한에 실종되고 말았다. 더구나 그녀는 글자 한 자도 모 르는 까막눈이다. 그 이름은 남편과 자식의 입이 아닌 엄마 자신의 입 을 통해 호출된다. 남편과 자식들에게 그녀는 그저 엄마 였을 뿐, 이름이 없었다. 그녀의 이름을 불러 준, 그녀에 게 이름을 돌려준 유일한 사람은 ‘이은규’였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있 어 주었네. 거기 있어줘서 고마웠소이. 그래서 내가 살 아갈 수 있었는지도 모르오. 마음이 불안할 때마다 당 신을 찾아가는 일을 반복하면서도 손도 잡지 못하게 해 미안했소. …… 당신은 내게 죄였고 행복이었네. 난 당 신 앞에서 기품 있어 보이고 싶었네.” 엄마의 저 고해 속에 유일하게 ‘박소녀’가 있다. 내색 하지 않았을 뿐 ‘엄마도 연정을 품을 줄 아는, 엄마도 오 욕칠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많은 대목 중 필자는 하필 어느 성급한 독자가 불륜을 상상할 수도 있는 이 대목을 끄집어냈을까? 그건 이 소설을 관통하는 ‘엄마의 일생’ 이 던지려는 중요한 메시지가 함축돼 있어서다. “나는 몇 해 전에 세워놓은 선산의 가묘로는 안 갈라 요. …… 오십 년도 넘게 이 집에 살았응게 인자는 날 쫌 놔주시오”라 말할 줄 아는 독립인격체로서 ‘엄마’ 말이 다. 물론, 어느 대목에서 공감하느냐는 것은 독자의 자 유라 정답은 없다. 엄마를 잃고 나서야 딸은 “엄마를 잃어버리고 나니 모든 일에 답이 생기네. 오빠, 엄마가 원하는 거 다 해줄 수 있었어. 별일도 아니었어. 내가 왜 그런 일로 엄마 속 을 끓였나 몰라”라며 후회한다. 엄마를 잃은 후에야 ‘나 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며. ‘자식들은 물론 시동생까지 챙기려 물불 안 가리고 일을 했던,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던, 한 겨울에 파란 슬리퍼를 신고 급하게 필요한 장남의 졸업 증명서를 들고 무작정 상경해 길을 묻고 또 물어 통행금 지 직전 아들의 거처에 도착해 추위에 벌벌 떠는, 까막 눈 엄마’를 둔 사람이라면 대체 소설 속의 딸이 ‘누구에 게 엄마를 부탁하는지’ 궁금증을 가져볼 일이다. 엄마도 오욕칠정이 있는 사람 91 법무사 2018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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