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 선거권이 주어지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2016년 기준으로 13개 국가를 제외한 전 세계 국가에 서 일정 연령 이상의 국민에게 선거권이 주어져 있다. 그 러나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보통선거가 처음부터 일반적 인 것은 아니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지 고 공화정이 수립되었지만, 참정권을 갖게 된 것은 부르 주아 남성에 한정됐다. 이후 참정권, 그중에서도 선거권을 쟁취하기 위한 지난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참정권을 획득한 순서는 부르주아 남성, 남 성 노동자, 흑인 남성, 여성순이었다. 선거권이 늦게 주어 질수록 사회적 차별이 컸을 뿐만 아니라 보편적 인권을 쟁취하기 위해 더 많은 투쟁과 희생이 따랐다. 차티스트, 남성노동자들의 선거권 실현운동 선거권을 포함한 참정권운동의 효시는 1836년 노동자 들이 중심이 된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으로 볼 수 있다. 프 랑스혁명 과정에서 니콜라 드 콩도르세와 올랭프 드 구주 등이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하는 등 이전에도 유사한 운동 이 있긴 했지만, 한 국가 내에서 전국적인 연대로 전개된 것은 차티스트 운동이 처음이었다. ‘차티스트 운동’은 1838년 공시한 「인민헌장(people’s charter)」의 실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837년 윌리엄 러벳이 기초하고 이듬해 배포된 인민헌장은 △남성의 보 통선거권, △비밀 무기명투표, △의원의 재산에 의한 자격 제한의 철폐, △의원에 대한 세비 지급, △평등선거구제, △의회의 매년소집 등 6개 항목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영국은 21세 이상의 남성이 600만 명을 넘었지만 선거권은 불과 84만 명에게만 주어졌다. 1832년 최초의 선거법 개정 때 납세액을 기준으로 선거권을 부여했기 때 문이다. 이에 런던노동자협회를 중심으로 21세 이상 모든 남성의 선거권을 인정하는 내용의 선거법 개정운동을 전 개했던 것이 바로 차티스트 운동이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대규모의 청 원, 시위운동, 무장봉기, 파업 등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좌절 되었다. 1839년에는 125만 명의 서명을 받은 헌장 청원서가 제출됐으나 의회는 이를 거부하고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차티스트 운동은 1848년까지 약 10년에 걸쳐 전개됐 으나 선거법 개정에서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마감됐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영국의 보통선거제도 확 립뿐 아니라 선거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67년 선거법 개정으로 대부분 도시의 임금노동자들 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었으며, 1884년에는 농민과 광산노 동자까지 확대되었다. 또 1872년에는 비밀투표제가 보장 돼 기존의 뇌물과 권력에 의한 투표 관행이 점차 사라지는 등 선거제도와 문화가 선진화되었다. 흑인 참정권, 정치적 헌신과 민권운동의 결과 한편, 흑인노예의 참정권 운동은 미국의 노예해방투쟁 및 흑인민권운동과 궤를 같이한다. 1787년 미국의 초기 헌법에서 흑인은 자유인의 5분의 3으로 계산됐으나 1865 년에는 노예제 폐지, 1870년에는 흑인의 참정권이 미국 헌법에 규정됐다. 채 50년이 안 되는 기간에 일어난 이 같 은 변화는 미국 북부의 산업화와 그에 따른 남북전쟁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미국의 노예제 폐지운동은 1780년, 펜실베이니아주 의 회가 처음으로 「노예해방법」을 통과시킨 뒤 공장의 임금노 동자로 일할 자유민이 필요했던 북부의 다른 주들도 동참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농업을 중시하는 남부에서는 여전히 노예제를 고 수하고자 했다. 곧 남부의 각 주들은 연방에서 탈퇴해 분리 독립을 선언, 1861년 이를 저지하려는 북부와 전쟁을 치렀 으나 1965년 봄, 북군의 승리로 종전되었다. 16 시사 속 법률 차별은 가고 인권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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