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참정권 운동은 1880년대 영국 여성들의 투쟁이 가장 선전적이다. 당시 여성참정권운동을 이끌던 에멀린 팽크허스트(사진 가운데)는 유리창 깨기와 방화, 투옥, 단식까지 불사하며 참정권 투쟁을 벌여 ‘전투파’의 리더로 불렸다. 사진은 1880년대 당시 시위 모습. 북부에서 노예해방 주장이 나온 것은 자본주의의 성장 으로 임금노동자의 필요 때문이었지만, 그것만이 미국 노 예해방의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남북전쟁이 북군의 승리 로 마감하기까지에는 흑인노예의 참여와 희생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1862년 7월, 링컨이 북군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참 여를 허용하면서 20만 명 이상의 흑인들이 북군에 입대 했다. 이들은 봉급과 진급 등에서 많은 차별을 받았음에 도 불구하고 전쟁에 큰 공헌을 했다. 북군에 종군한 흑인 군인 중 약 4만 명이 전사했고, 23명이 미국 군인 최고의 명예훈장인 ‘명예의 메달’을 받았다. 남북전쟁이 종료되고 5년 뒤인 1870년, 수정헌법 15조 에 흑인의 참정권이 규정됐지만 이것이 지금과 같은 보통 선거권은 아니었다. 남부에서는 인종차별법인 「짐크로법」 을 제정하고, 교육받지 않은 흑인에게는 선거권을 주지 않 는다는 조항을 넣어 사실상 선거권을 부정했다. 흑인이 투표를 하기 위해서는 문맹검사를 통과해야 했는데, 라틴 어를 읽고 해석하라는 등의 터무니없는 문제들로 이루어 진 검사였다. 미국사회에서 흑인차별이 본격적으로 완화된 것은 1, 2 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흑인들의 참전을 위해 군대 내 차 별을 금지하면서부터다. 이후 1964년, 남부 흑인들의 실 질적 투표권 보장운동인 ‘미시시피 자유여름운동’과 1965 년 3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로 유명한 셀마행진 등 이 전개되었고, 마침내 그해 「연방선거권법(Voting Rights Act)」이 시행되면서 흑인들도 실질적인 선거권을 보장받 을 수 있게 되었다. 방화·투옥·단식 투쟁으로 쟁취한 여성 참정권 미국에서 여성의 선거권은 1920년에서야 연방헌법에 17 법무사 2018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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