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놓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사실 철학자나 예술가의 눈에 세상이 평화롭게 보인다면 그들은 남들이 생각하고 보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내놓을 수 없을 것이다. 생명의 탄 생에는 출산의 고통이 있듯이, 그들에게 고통이란 영혼이 실린 작품들을 낳는 창조의 과정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죽었지만 오늘 책으로, 그림으로 우리 앞에 살아 있다. 고통이란 물론 힘든 것이지만, 그것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 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 에게 주어진 어려움을 감당하며 이겨내는 과정은 우리를 한층 깊고 단단하게 만든다. 내가 고통을 겪어봐야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껴안는 품도 생겨나고, 자신을 돌아보 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된다. 입구에는 고통의 어려움만 있겠지만, 그 출구에는 부쩍 성장한 내가 서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잘 알려진 시지프의 신화를 통해 고통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고통의 전모를 의식하 는 ‘시지프적 깨어남’을 설명하고 있다. 신들은 자신들을 멸시 한 시지프에게 산꼭대기까지 바위를 끊임없이 굴려 올려야 하는 형벌을 내렸다. 그 기나긴 노력 끝에 시지프의 목표는 달성되지만, 바로 그 순간 시지프는 바위가 저 산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시지프는 산꼭대기 를 향해 바위를 끌어올리기 위해 또다시 들판으로 내려간다. 시지프는 이 반복되는 형벌의 과정에서 어떤 의미나 희망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무의미한 일을 영원히 반 복해야 하는 것이 그의 운명이다. 하지만 카뮈는 시지프가 되돌아 내려가려는 그 잠깐의 순간에 주목한다. 가쁜 숨 을 고르는 그 시간은 의식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형벌을 받기 위해 다시 내려가야 한 다는 생각을 하는 의식의 순간이야말로 시지프가 운명보다 더 우월한 순간이다. 그때 비로소 시지프는 바위보다 강하다. 다시 산을 내려오는 시지프는 끝없이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자신의 비참한 조건의 전모를 알고 있다. 물론 그에게는 고뇌를 안겨다주는 통찰이겠지만, 자신의 고통을 직시함으로써 시 련은 자신의 것이 된다. 그리하여 시지프는 고통에 대한 승리를 완성할 수 있다. 그래 서 카뮈는 “무수한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것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 분하다”며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한다. 고통에도 의미가 있다 79 법무사 2018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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