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법무사 5월호

우리는 삶 속에서의 고통을 피할 수가 없다. 하지만 고통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고통을 견뎌낸다. 아버지가 새벽부터 공사현장에 나가고 어머니가 청소 일을 나가며 고되게 생활하더라도, 그것을 감내하는 것은 자식들을 제대로 키운다는 의미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물고문, 전기고문까지 당하는 고통을 견 뎌내는 사람이 있었던 것은, 자신이 무너지지 않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작 힘든 것은 고통 자체보다도, 내가 겪는 고통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시간이 계속되는 일이다.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삶을 견뎌 내는 것이고, 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망하여 심지어 자살까지 하게 되 는 것이다. 하지만 혼자 버려져 있는 사람이 고통으로부터 어떤 의미 를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은 고통 자체로 이미 힘들며 그 의미를 찾을 여력을 갖지 못하기 쉽다. 그렇다 면 고통에 갇혀 고립되어 있는 그에게 힘을 불어넣어줄 사람 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다. 사랑의 시선을 갖고 그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그가 고통스럽더라도 견뎌내야 하 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하며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삶은 종종 고통스럽지 만, 그래도 살만한 이유가 있음을 같이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삶의 바위를 끝없이 굴려 올려야 하는 고통이 혼자만의 일은 아니다. 우리는 산꼭대 기를 향해 저마다의 바위를 굴려 올리고 있다. 모든 인간에게서 고통이 피할 수 없는 것 이라면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흔히 “고통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남의 고통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에서 벗어나 쇼펜하우어가 말한 ‘동고’(同苦, Mitleid)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우리는 한결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내가 어 려울 때 다른 이들에게 내 손을 잡아 달라 부탁하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어려울 때 는 내가 그의 손을 잡아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세상을 함께 사는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를 주고 힘을 주는 존재일 수 있어야 하 지 않을까. 왜 인간들은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을 바로 옆에 있는 인간이 아닌 초월적 함께하는 고통의 윤리 문화의 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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