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갑질은 인권과 관련해 어떤 의미를 지닐까? 밝혀진 대부분의 갑질 사례들이 인격 모독을 포함해 을에 대한 다양한 인권 침해가 수반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이다. 그러나 갑질은 1789년부터 시작된 세계 인권투쟁사 전체를 무위로 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전방위 적이라는 점에서 다른 인권침해 사례와는 본질적으로 다 르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을 기원으로 하는 인권투쟁의 역 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됐다. 하나는 보장해야 할 인권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인권 보장에서 차별받는 대상을 축소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갑질은 을에게 보 장되어야 할 대부분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으며, 성별·연 령·인종 등 차별이 금지된 모든 부문에 걸쳐 자행되고 있 다는 점에서 200년 넘는 인권의 역사를 원점으로 돌리는 일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권력관계가 있는 곳, 어김없이 나타나는 갑질 대한항공 사주 일가의 갑질은 남녀 한국인은 물론 필리 핀 가사도우미에게까지 자행됐으며 심각한 인격 모독과 함께 해고 위협에 따른 생존권의 침해, 거주이전의 자유 까지 침해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갑질에 의한 인권 침 해에서 예외가 있다면 참정권과 생명권 정도이다. 심지어 재판받을 권리조차도 회유 및 위협에 의해 침해된 정황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전방위적 인권 침해는 1789년 프랑스대혁 명 이전, 인권이란 개념이 등장하지 않았을 때나 가능했 던, 그러니까 노예제사회에서의 노예를 대상으로나 자행 되었던 정도의 일이다. 차이가 있다면 노예는 고정된 신분 이고, 갑질의 대상인 을은 계약관계에 따라 유동적이라는 점뿐. 한국 사회의 갑질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갑질’ 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2013년 즈음이지만 갑질과 유사한 행태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한 국 노동운동사는 갑질에 대한 반작용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사측과 노동자의 관계는 고용과 노동력 제 공의 관계를 넘어 인신 자체를 저당 잡히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1987년 7·8·9월의 노동자대투쟁 당시 현대 중공업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며 내건 첫 번째 요구는 임 금인상이 아니라 ‘두발 자유화’였다. 노동자에게는 머리조 차 마음대로 자를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또, 1978년 동일 방직에서는 사측이 노조 대의원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여성 노조원들에게 똥물을 뿌리는 일까지 있었다. 이처럼 고용관계에 기반을 둔 인권 침해는 노동운동이 미약하고 인권의식이 낮았던 시절에 훨씬 더 심각했다. 그 런데도 근래 ‘갑질’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주목받게 된 것 은 이전에 비해 높아진 국민들의 인권의식과 여론을 환기 시킬 수 있는 SNS 같은 도구들이 발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환경의 긍정적 변화만으로 그간 은 폐돼 있던 갑질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 현상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과거 고용관계에 의한 인권침해와 지금 횡행하는 갑질이 갖는 근본적인 차이는 ‘정도’보다는 ‘범 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과거에는 특정관계에 서만 나타나던 부당한 인권 침해가 지금은 사회의 모든 권력관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고용관계뿐 아니라 도급관계와 매매관계를 포함한 모 든 권리관계, 심지어 정규직과 비정규직, 상사와 부하직원, 그리고 판매원과 손님 등 권력관계가 형성되는 모든 곳에 서 행사되고 있다는 것이 갑질의 특징이다. 아래 열거하는 실제 사건들을 다시 돌이켜 본다면 실감이 날 것이다. 우선 고용관계에서 발생한 사건부터 보자. 가장 심각했 던 사건은 지난 2014년 10월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경비원 분신자살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은 한 입주민이 아파트 5층에서 경비원을 향해 음식물을 던지 16 시사 속 법률 차별은 가고 인권이 오다
RkJQdWJsaXNoZXIy ODExNj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