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법무사 6월호

“너는 이 사람에게 분노했다가 또 저 사람에게 분노한다. 처음에는 노예에게, 다음 에는 자유민에게 화를 낸다. 이번에는 부모에게, 다음에는 아이들에게, 지인에게, 나 중에는 낯선 사람에게도 분노한다. 마음이 개입하지 않으면 도처에 분노할 충분한 이 유가 존재한다. 광기(rabies)가 그대를 여기저기로, 이 길에서 저 길로 끌고 다닐 것이 다. 항상 새로운 자극이 생기면 너의 광기는 계속될 것이다. 자, 불행한 사람아, 그대는 사랑할 시간을 찾을 수 있는가?” 몽테뉴 또한 『에세』에서 분노에 의해 조종당하는 인간의 모습을 우려하고 있다. “다른 무기들은 우리가 그 무기를 움직이지만, 분노라고 하는 무기는 반대로 우리를 움직인다. 분노라는 무기가 우리를 잡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이 무기를 잡고 있는 것 은 아니다”라고 몽테뉴는 지적한다. 이는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격정적 분노’에 대한 우려이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 한 분노나 증오에 사로잡혀 빠져나오지 못할 때 자신의 심성이 파괴되는 것 같은 우울 감을 느끼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앞서 말한 아리스토텔레스도 모든 분노를 다 정당화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분노를 원했다. 그것은 중용의 분노이며, 절제된 분 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와 관련하여 중용적인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 한다. 그에 따르면 “온유한 사람은 동요가 없는 사람이며, 또 감정에 의해 휘둘리지 않고 이성이 명한 것처럼 그렇게, 화를 낼 만한 대상에 대해 화를 낼 만큼의 시간 동안만 분 노하는 사람이다.” 온유한 사람은 화를 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사람에게, 적절하지 않은 일을 갖고, 적절하지 않은 방식과 목적으로 화를 내지 않는다. 온유한 사람은 적 절한 상황에서 마땅한 때에 화를 낼 줄 알고, 적당한 때에 화를 멈출 줄 아는 사람이다. 지나치지 않은, 중용을 따르는 분노의 필요성은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유용하다. 분 노의 과도함으로 인해 오히려 그 분노에 대한 설득력과 공감력을 스스로 훼손시키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적인 분노가 지나치게 격정적으로 표현될 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모습도 많이 보았다. 분노의 힘이 언제나 큰 것만은 아니다. 분노를 통해 타인에게 위압감을 느끼게 하면 그 사람을 일시적으로 제압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의 마음까지 바꾸어놓지는 못 한다. 격정의 분노는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상대에게 표현할 수는 있지만 서로 간의 충돌을 낳게 된다. 문화의 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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