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년 평창등기소, 관내 법무사는 5명 1967년 9월 15일, 33세의 늦은 나이에 법원 9급 공 무원으로 임용된 필자가 처음으로 발령을 받은 곳은 지 난 2월 동계올림픽 개최지이기도 한 평창의 ‘춘천지방 법원 평창등기소’였다. 오대산 밑에 소재했던 당시의 평창등기소는 영동고 속도로가 생기기 전이라 하루 2회 운영하는 서울-평창 간 시외버스를 타고 약 9시간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었 던 오지 중의 오지였다. 당시 평창등기소에는 등기소장인 법원서기(현재는 주사) 1명과 정리 1명, 사환 1명으로 3명의 직원이 있었 고, 관내에는 5명의 법무사(당시는 사법서사)가 있었다. 법조 경력이 있는 법무사 1명과 특별채용시험을 거쳐 법원장이 자격을 인정한 법무사가 4명이었다. 이런 작은 지역의 등기소에 업무량이 많을 리는 없었 지만, 문제는 모든 업무를 직접 수작업으로 해야 한다 는 것이었다. 타자기가 없으니 등기부 기입도 한지로 묶인 등기부 에 먹물로 기재해야 했고, 복사기 같은 것은 더더욱 있 을 리 없으니 등기부등본 신청이 들어오면 먹지를 받치 고 일일이 필사해 교부해야 했다. 새로 부임한 67년 설 무렵에는 갑자기 4천 통의 등기 부등본 신청이 밀려들어 결국 집에도 가지 못하고 4천 통의 등본을 필사하며 보냈던 적도 있었다. 성능이 좋지 않은 펜으로 4천 통의 등기부등본을 필 사하노라면 나중에는 볼펜의 잉크가 번져 처음부터 다 시 써야 하는 때도 있었고, 등본 작성용지가 찢어져 새 로 쓰거나 추위에 손이 굳거나 손가락이 굽어 드문드문 손을 녹여가며 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이 고되다고 등본 발행을 마냥 미룰 수도 없는 일 이니 당시 등기소 직원들은 당연한 일로 여기며 큰 불 평 없이 그 일들을 해냈다. 28,000건 약식사건, 6개월 만에 700건으로 어느덧 공무원 생활 6년차에 접어들었던 1973년, 필 자는 법원주사보로 승진해 서울형사지방법원 제3과 약식계로 발령을 받았다. 발령 후 필자는 평소 잘 아는 당시 임기호 법원장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법원장은 무척 반가워 하면서 “잘 왔네.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어. 날 좀 따라와 봐”라고 하며 어디론가 향했다. 영문도 모 르고 뒤쫓아 간 곳은 다름 아닌 약식사건 창고. 법원장은 창고 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더니 한쪽 바닥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서류더미를 가리키며 “저 미제 약식사건들 때문에 행정처장님께 책문을 당 할 지경이야. 윤 계장이 책임지고 해결하게”라고 지시 를 하는 것이다. 약식사건은 약식명령사건으로, 지방법원의 관할사 건에 대하여 검사의 청구가 있을 때 공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검사가 제출한 자료만을 조사하여 피고인에게 벌 금·과료·몰수의 형을 과하는 재판절차를 말한다. 필자는 그때부터 미제 약식사건 해결을 맡아 곧바 로 창고 안에 있는 약식기록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1967~1972년도까지 창고 안에는 6년분의 약식사건이 누적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신건도 있지만, 타자만 치고 등본을 발송하지 않았거나 등본은 작성되었는데 송달 은 하지 않은 사건, 송달은 했는데 확정되지 않은 사건, 확정되었는데 검찰에 기록을 넘기지 않은 사건 등등 여 러 사건이 혼재되어 있어 미제사건의 건수를 파악하는 것 자체부터가 난감한 상황이었다. 필자는 다음 날 법원장을 찾아가 창고에 6층의 선반 을 설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곧 선반이 설치되었고, 필 자는 연도별로 기록을 분류해 각 층마다 체계적으로 비 치, 정리했다. 모든 작업이 끝난 후 전체 기록을 파악해 보니, 미제사건의 총 건수가 28,000건이나 되었다. 다시 법원장에게 보고해 타자수 6명과 임시직원 6 85 법무사 2018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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