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법무사 6월호

명, 총 12명의 직원을 증원 받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미제사건 해결에 나섰다. 타자와 등본 작성, 송달 등은 우리 팀에서 직접 하고, 검찰에 넘겨야 할 기록은 넘기 는 등 업무를 분장해 처리했다. 6개월이 지나자 산더미 같았던 미제사건이 700건으로 줄어들었다. 미제사건 의 97.5%를 단 6개월 만에 처리한 것이다. 결과를 보고받은 법원장은 크게 기뻐했다. 당시 약식 계를 감독했던 이일영 과장도 이 일을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필자는 이 일로 당시 선망의 부서(!)였던 ‘형사 단독과’로 발령을 받았다. 형사단독과에 근무하면서는 ‘안양토지사건’과 ‘국군 묘지 사건’이 기억난다. 둘 다 언론에 보도된 바 있었던 장기 미제사건이었는데, 이 중 안양토지사건은 피고인 이 200명이 넘고, 사건 기록만 1건당 큰 캐비닛 하나가 꽉 찰 정도로 방대했다. 그래서인지 새로 부임한 담당판사마다 부담을 느껴 처리를 미뤘는데, 어느 날 8단독판사로 부임한 최종영 판사(후일 대법원장 역임)가 우선 처리를 자청하더니 몇 개월 간 19회의 분리 심리를 진행하며 결국 피고인 전원을 일시 선고, 사건을 종결시켰다. 바로 이때 입회서기가 수원지방법무사회(현 경기중 앙지방법무사회) 회장을 역임했던 조정곤 법무사다. 당시 법원 사람들은 끈기 있게 속전속결로 사건을 처 리하던 최 판사를 지켜보며 이구동성으로 크게 될 사 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결국 그는 1999년 대법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78년, 대법관 13명에 입회서기는 단 1명 1978년 5월경부터 81년 2월경까지 약 3년 동안 필자 는 대법원 특별과와 민사과에서 대법관 입회서기로 참 여했다. 입회서기의 업무는 사건의 기록을 검토한 후 상 고 취하나 상고이유서 미제출 및 기간도과, 보정명령 미 이행 등으로 인한 형식적 절차에 대해 각하 사유 등을 보고하는 일이었다. 당시 대법관은 모두 13명이었는데, 특별과의 입회서 기는 정원이 1명뿐이어서 필자 혼자 대법관 13명의 특 별사건을 담당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각자 업무 스타 일이 다른 대법관들에게 맞춰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 게 각 대법관의 업무성향을 파악할 수 있었고, 대인관 계와 업무능력 향상에도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 당시 민사소송법의 대가였던 이영섭 대법관(후일 대 법원장 역임)은 하급심 판결을 존중하여 파기환송이 거의 없었던 반면, 안병수 대법관은 하급심 판결을 꼼 꼼하게 분석해 파기환송률이 제일 높았다. 또, 강안희 대법관은 판결문에 상고이유를 하나하나 철저하게 밝히다 보니, 판결문이 엄청 길어져 방대했던 반면, 민문기 대법관은 개개의 상고이유에 대해 언급하 지 않고 모두에 미루어 한꺼번에 판단하는 스타일이어 서 판결문이 비교적 간결했다. 특히 김용철 대법관(후일 대법원장 역임)은 입회서기 를 재판부 구성원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철저히 기록을 파악해 보고토록 했는데, 이렇게 하급직원도 업무의 파트너로서 인정하고 존중해주던 김 대법관님의 업무 철학에 대해 지금도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구 「민사소송법」 당시의 경매법정은? 필자는 1976년, 서울지방법원 동부지원 민사과 경매 계장을 시작으로 공무원교육원 경매·신청 담당교수, 서 울지방법원 집행과장, 서울지방법원 소속 집행관 등을 거치며 오랜 시간 집행 업무를 담당했다. 그러나 2002.7.1. 「민사집행법」이 개정·시행된 이후 에는 법무사로서만 업무를 접했다. 여기서는 필자가 직 86 법조, 그땐 그랬지 문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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