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인터뷰 / 여상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쿼바디스, 대한민국 부동산 대한민국 부동산시장의 결정적인 분기점, 1989년 업계 핫이슈 개인회생 포괄수임 「변호사법」 위반사건의 대응 Vol. 619 2019• 01
발행인 최영승 편집인 김성수 편집주간 오일 편집위원 강신기·김미애·김상호·박재승·안신영· 이상진·신혜주·정정훈·주영진·최희수 편집장 임정와 발행처 대한법무사협회 발행일 2019년 1월 5일 통권 제619호 디자인·인쇄 주식회사 더블루랩 일러스트 제비J 정기간행물 등록 1965년 5월 7일 강남, 라 00102호 주소 서울시 강남구 논현로 651 (논현동, 법무사회관) 전화 02)511-1906~9 팩스 02)546-4362 이메일 <편집부> kabl@hanmail.net 홈페이지 www.kabl.kr 비매품 ※ 본지에 게재된 글들은 대한법무사협회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국민과 함께하는 든든한 버팀목 “일하는 협회” 이야기 대한법무사협회 대한법무사협회는 출생부터 상속까지, 아이부터 노인까지 우리네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법률적 문제들을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큰 나무와 같은 너른 품으로 안전하게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대한법무사협회는 국민의 평안하고 여유로운 일상생활을 받쳐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습니다. 01월
새해를 열며 06 신년사 _ 기해년 새해, 위기 앞에 하나 되는 슬기를 발휘합시다! 08 신년인사 만나고 싶었습니다 10 인터뷰 _ 여상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동정 등록 90 협회는 지금 _ 협회·지방회·법무사 95 법무사 신규등록·등록공고 98 편집위원회 레터 Contents 법으로 본 세상 16 쿼바디스, 대한민국 부동산 _ 대한민국 부동산시장의 결정적인 분기점, 1989년 22 사건 그 이후 _ 제이유 다단계 사기사건, 더 이상의 피해자는 없을까? 28 주목! 이 법률 _ ‘윤창호 법’ 통과 이후에도 여전히 남은 과제 32 법률고민 상담소 _ 민사, 부동산등기, 부동산경매 분야 상담사례 36 최근 시행법령 _ 「국적법」 개정 (2018.12.20. 시행) 등 99 내가 만난 법무사 _ 미수금반환소송, 현실적인 조언으로 100% 승소했어요
법무사 시시각각 38 업계 핫이슈 _ 개인회생 포괄수임 「변호사법」 위반사건의 대응 _ 「부동산등기법」 개정(안)에 따른 ‘본직확인 첨부정보’ 양식 제안 46 와글와글 발언대 _ (사)한국성년후견지원본부의 현황과 지원의 필요성 _ 서울중앙회, 인터넷 상의 등기덤핑행위 제재와 그 의미 52 법무사가 달린다 _ 서울동부지검 형사상고심의위원, 문혜란 법무사 56 업계 투데이 _ 한국시험법무사회, 대법원 앞 항의시위 _ 문영수 법무사, 제17회 법조봉사대상 수상 _ 연말연시 법무사 공익활동 전개 _ 2019년 달라지는 법무사업계 관련제도, 부동산제도 현장활용 실무지식 62 이달의 판례 _ 2016다246800판결[추심금], 2018다215756판결 68 나의 사건수임기 _ ‘외국인·재외국민 상속등기’ 첫 수임 고군분투 돌파記 72 법무사 실무광장 _ ‘상속재산 분할심판 청구’ 실무에서 주의할 점 80 내 편을 만드는 소통의 기술 _ 통(通)하는 소통을 위한 3가지 전제 문화가 있는 삶 84 콩트 _ 우리동네 포장마차 1. 주인장 황 씨 부부 88 약사엄마의 복약지도 _ 간(肝) 건강을 위한 영양제 가이드 2019년 1월 vol. 619
기해년 새해, 위기 앞에 하나 되는 슬기를 발휘합시다! 전국의 법무사 가족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황금돼지의 해, 기해년(己亥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되돌아보면 법무사업계로서 지난해는 새로운 제21 대 집행부가 탄생한 해이기도 합니다. 「법무사법」 개 정안의 입법 발의 및 입법을 위한 노력, 「부동산등기 법」 개정안의 법무부 이송을 통한 정부입법안 마련 및 국회이송을 위한 노력, 회생업무처리 관련 「변호사 법」 위반사건의 대응책 마련, 통합정보시스템의 활성 화를 위한 조치 강구, 변경된 보수표에 의거한 금융권 협약 추진, 공공기관 및 금융권의 갑질행위 근절을 위 한 협회 차원의 강력한 대응 천명, 공익활동을 통한 대국민 위상제고를 위한 노력, 협회 내부에 존재하는 크고 작은 부조리의 제자리 찾기 노력 등 여러 문제들 을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하여 왔습니다. 이들 중 특히 새해 들어 역점을 두고 추진해야 할 것은 당장 눈앞에 다가온 「법무사법」 개정안 및 「부 동산등기법」 개정안의 입법을 위한 노력, 그리고 회생 업무처리 관련 「변호사법」 위반 사건의 대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새해에 새로운 마음으로 협회 및 지방회의 대 열을 재정비하면서 이러한 중요 현안 추진에 총력을 쏟아부을 것입니다. 첫째, 「법무사법」 개정안의 국회통과입니다. 「법무사법」 개정안은 그 내용에 여러 가지가 있으 나, 그중 중요한 것이 비송사건의 대리 및 개인회생· 6 새해를 열며 + 신년사
파산사건의 대리 문제일 것입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사실상 법무사가 주도하여 처리해 왔던 업 무를 법제화하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를 법제화하 여 좀 더 안정적 기반 위에서 업무를 처리하자는 것 입니다. 곧 국회 제1소위 논의테이블에 상정되어 논의 가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므로 이에 대한 이론적 근거 를 만들고, 이를 토대로 대국민 설득작업 등 행동에 나설 것입니다. 둘째, 자격자대리인의 본인확인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부동산등기법」 개정안의 국회통과 및 전자 등기의 해결책 모색입니다. 부동산등기와 관련하여 명의대여가 횡행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 법안의 통과는 매우 중요합니다. 법무사 가 직접 등기의뢰인에게 등기의사의 진정성을 확인하 고 등기업무를 실행할 때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게 될 것이며 국민의 신뢰가 뒤따를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 로써 법무사가 법무사답게 활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법안이 통과되면 동시에 지금까지 무방비 상태로 사실상 다수 법무사의 접근을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인 전자등기 문제도 실마리가 풀릴 것으로 보 고 있습니다. 본인확인 문제를 전문자격사인 법무사 가 직접 확인하는 시스템을 장착하게 되면 지금까지 의 저가보수 문제 및 이에 따른 일부 법무법인만이 처 리하는 사례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개인회생업무처리 관련 「변호사법」 위반 사 건의 대응책 모색입니다. 이것은 당장 눈앞에 닥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법무사법」 개정안의 한 내용에도 포함되 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포괄수임’이라는 「변호 사법」에 따른 위험성에 항상 노출되어 왔습니다. 따라 서 궁극적으로는 입법으로 해결할 문제라 보이나 현 재 재판이 진행 중이므로 강력한 대응이 필요한 부분 입니다. 이에 협회는 입법 추진과 연계하여 가능한 모 든 활동을 전개해 나갈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여러 가지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도 산적해 있고 긴장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하지 만 분명한 사실은 새해에 새로운 마음으로 이러한 어 려움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해결하고자 하는 의 지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법무사는 위기 앞에 하나로 잘 뭉쳐 이를 극 복하는 슬기로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 반드시 해내야 합니다. 올해는 법무사협회 창설 70주년의 해가 되는 뜻 깊은 해입니다. 이러한 새해를 맞이하여 또다시 우리 모두 하나 되 는 미덕을 발휘하여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도록 다 같이 협력할 것을 간청드립니다. 전국 법무사 가족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에 황금돼 지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2019년 새해 벽두에 대한법무사협회장 최영승 드림 7 법무사 2019년 1월호
기해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대한법무사협회는 지방법무사회와 그 회원의 지도 및 연락·감독사무, 등록 및 등록심사업무와 더불어 법률전문가로서의 공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손해배상공제사업, 제도개선연구, 연수 및 홍보활동, 분쟁조정 및 고충처리제도, 각종 대국민 봉사활동 등을 전개하고 있으며, 법무사제도의 발전과 운영을 위해 다수의 위원회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부협회장 김태영(상근) 김충안 김성수 전문위원 조신기 박성기 최영민 김우종 정경표 감사 박진열 정칠환 전재우 이사 김정규 김정실 노명자 염춘필 김영태 박창규 서원석 강채원 조재경 장기택 김진영 김종화 백성기 최인수 박광문 박철훈 오병래 김헌석 도종섭 고점성 이승도 황윤찬 이성수 김영곤 최용모 김경찬 고문 이재연 박태원 박경호 공정환 임재현 노용성 원장 최영승 부원장 김태영 위원 김 종현 조태익 김혜주 고용환 이진수 김희성 정종현 황승수 박충근 조명호 김석민 최성수 정성구 강석근 하상철 김재영 정동열 강항숙 법무사연수원 운영위원회 위원장 최영승 위원 김 정규 하경민 정병산 김중제 이좌용 박영기 박연휘 정일권 등록심사위원회 회관관리위원회 위원장 김태영 위원 이 광현 천득현 김형곤 김영길 이남윤 김재룡 김홍배 최귀철 협회장 최영승 8 새해를 열며 + 신년 인사
윤리위원회 공제사업위원회 회지편집위원회 위원 어금숙 안상기 전두표 김지회 김헌석 전종훈 분쟁조정위원회 소장 김인엽 부소장 김종호 연구위원 이훈구 김회진 이창용 최현진 김선엽 윤원서 김혜연 정일영 서유석 조규일 조형권 김충식 법제연구소 부위원장 정정훈 위원 홍 동희 정선우 박정민 이덕승 김소현 노흥순 박종호 홍보위원회 위원 고재도 이경석 이민호 이용복 이은정 유혁재 장종철 정보화위원회 위원장 김충안 위원 김 종현 조태익 김혜주 고용환 이진수 김희성 정종현 황승수 박충근 조명호 김석민 최성수 정성구 강석근 하상철 김재영 정동열 강항숙 위원장 장윤철 부위원장 곽규정 위원 ( 당연직) 정비호 김준호 운행준 김탁경 강채원 육학수 홍진표 김미숙 이창주 이병재 배희건 남철우 박유대 지창호 정흔연 장시언 고태현 (위촉) 이전권 고덕철 성미애 신동환 권명희 권철현 위원장 김성수 편집주간 오 일 편집위원 강신기 이상진 안신영 신혜주 김미애 주영진 박재승 정정훈 최희수 김상호 공익활동위원회 위원장 백성기 부위원장 홍동희 위원 안윤표 최희영 주경림 김동식 주낙현 이일수 정창교 임영주 9 법무사 2019년 1월호
직역 간 충돌 법안? 귀를 열면 답이 있습니다 여상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진행 김성수 본지 편집위원장·대한법무사협회 부협회장 사진 김흥구 더블루랩 10 만나고 싶었습니다 + 인터뷰
당리당략에 치우치지 않는 법사위 만들고 싶어 Q. 바쁘신 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지난해 7월부터 제20대 국회 하반기 법사위원장 을 맡아 6개월여 일해 오셨는데, 처음 취임하셨을 때 와 직접 일해 본 후 생각이나 소감이 달라진 점이 있다 면 무엇일까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등 뒤 벽 에 걸려 있는 “國益優先 法司委, 法治守護 法司委, 品 位維持 法司委(국익우선 법사위, 법치수호 법사위, 품 위유지 법사위)”라는 글의 서예 작품을 가리키며] 저 작품 속 글씨는 우리 고향 출신 서예가가 선물로 준 것 인데, 제가 첫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한 인사말을 듣고 써준 거예요. 법사위원장이 별도의 취임식이 있는 건 아니니까 앞으로 어떻게 법사위를 이끌어가겠다 하 는 생각을 밝힌 일종의 취임사라고 해야죠. 그때 제가 그랬습니다. 지금까지 법사위는 여야 간 정쟁의 장이 되어 왔는데, 법사위가 이전처럼 계속해 서 당리당략을 우선해 운영한다면 계속해서 국민들 에게 욕을 먹을 테고, 법사위가 욕을 먹으면 곧 국회 가 욕을 먹는 격이 된다. 국회에서 만드는 모든 법이 법사위를 통과하게 되 잖아요. 그래서 우리 법사위가 잘하면 결국 국회가 잘 하는 셈이고, 그럼 우리 법사위가 일하는 국회를 만드 는 데 전초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법 사위가 일을 하되, 국익을 생각하며 일을 하자, 당리당 략은 제쳐두고 항상 국민을 먼저 생각하고, 그래서 국 익을 우선하는 그런 법사위를 나는 운영해 보고 싶다. 또, 법 하면 곧 ‘정의’를 말하는 것인데, 정의를 구현 하는 법사위를 만들어 보고 싶다, 이때의 ‘정의’라는 것은 ‘실질적 정의’를 말하는 것이고, 곧 ‘법치’를 말하 는 것이죠. 그러니까 정의가 곧 법치인데, 우리 법사 위는 실질적 법치를 하는 그런 법사위로 만들어 가자 고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정쟁의 장이 되어 볼썽사납게 싸 우는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욕을 먹고, 법사위원들과 나아가 국회의원 전체를 욕먹게 하는 그런 법사위는 되지 않아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품위를 유 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국익을 우선해야 하고, 법치를 수호하자는데 뭐가 낯 붉힐 일이 있고, 큰소리 칠 일이 있겠는가, 품위는 자연스럽게 유지될 것이다, 인사말을 했던 그때나 지 금이나 저는 같은 생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Q. 위원장으로서 법사위 운영에 대한 다짐을 잊지 않 최근 법무사의 개인회생사건 유죄판결을 둘러싸고 법무사들의 거센 항의가 이어지는 가운데, 법무사의 민사신청 대리를 규정한 「법무사법」 개정안이 국회 법사위 제1소위에 계류 중임에 따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이에 지난 12월 27일 오전 10시, 국회 본청을 찾아 여상규 법사위원장을 만났다. 법사위의 운영과 위원장으로서 법사위 운영에 대한 방향과 생각, 그리고 최근의 사법부 위기와 법조직역 간의 충 돌에 대한 해법 등 법무사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편집부> 11 법무사 2019년 1월호
민생·사법개혁 법안, 정쟁·갈등 안타까워 Q. 법사위의 역할에서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보다 민 생법안의 빠른 처리가 될 텐데, 위원장님도 취임 당시 민 생법안 처리를 최우선하겠다는 말씀을 하신 바 있습니다. 그와 관련해 위원장으로서 평가해 본다면 어떠신지요? 경제살리기 법안, 민생법안, 이런 것들이 사실은 가 장 우선적으로 처리되어야 할 법안이라고 생각해 왔 어요. 또 우선해서 처리하려고 하고요. 그런데 이런 법안들이 여야 정쟁으로 지연되는 것이 많이 아쉽지 요. 안타깝기도 하고. 최근에는 사법개혁 관련 법안들이 상당히 시급한 법안이긴 한데, 법원·검찰·경찰 각 기관마다 서로 다 른 주장을 하고 있어 처리가 지연되고 있어 안타깝습 니다. 사법개혁을 하는 것은 저는 절대명제라고 봐요. 그런데 그 개혁의 결과 각 기관들의 권한이나 위상에 변동들이 있을 수 있다 보니까 기관들 간에 의견이 일 치되지 않아 어려움이 있습니다. Q. 위원장님은 판사 출신으로 사법부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으리라 봅니다만, 사법부가 현재 위기인 것 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 위기의 발단은 어 디에서 왔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은 무엇이라 생 각하시는지요? 오해가 있는데, 저는 대법원장, 대법관, 법원, 법관, 이런 구체적인 사법부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법 본연, 그러니까 사법권의 독 립이나 재판의 독립과 같은 가치를 반드시 지켜줘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일전에 어떤 법사위원이 법원의 구체적인 재판에 대해 비판을 하더란 말이에요. 영장이 기각됐 다, 왜 그렇게 많이 기각되었냐, 기각사유가 이러이러 한데 잘못된 거 아니냐, 저는 이렇게 정치권에서 따지 으려고 액자까지 만드셨다니 인상적입니다. 그렇다면 지난 6개월 위원장의 활동에 대해 자평한다면 몇 점 을 주시겠습니까? 글쎄요, 한 50점? 아직도 여전히 당리당략이 있죠. 예를 들어 야당에서 여당의 잘못을 지적하면 여당은 그에 역지사지하기보다는 무조건 맞받아 치려고만 하는 경향이 꽤 강해요. 그러다 보면 회의 때 큰소리가 나오게 되고, 저는 법 사위원장으로서 회의를 진행해야 할 책무가 있으니 발 언권을 얻지 않고 말하는 위원들에게 제지를 가하죠. 그런데 위원장이 한마디 한다고 해서 금방 수그러 듭니까, 계속 떠들고 그러면 나도 큰소리를 치게 되고, 회의는 엉망이 되고 결국 의사봉을 두드리게 되고…, 그런 일이 몇 번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가면 갈수록 조금씩 내 진심을 알아 주는 것 같아요. 여당도 법사위원장이 야당 출신이긴 하지만 회의 진행은 공정하게 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아직도 여전히 안 고쳐지는 것이 있지만, 저 로서는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정치라는 게 서로 파당이 갈라질 수밖에 없는 거고, 그래서 정당이 있는 거고, 그래서 여야 간 에 큰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 게 정치다 싶은 생각도 들거든요. 나름대로 하려고는 하는데 결국은 50% 정 도 실천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80점이나 90점쯤 되 면 좋겠지만, 정치권이라는 게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는 과정이죠. 사실 내가 정치를 잘 몰라요. 2008년 18대 총선 때 제 지역구인 경남 남해 하동이 전략공천지구로 지정 되면서 생각지 않게 부르심을 받고 정계에 입문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법조인 티를 못 벗고 법사위 운영을 법대로, 원리원칙대로 하려는 것이 맞아요. 여야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운영을 한다는 인정도 받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정치적 융통성이 없 다는 평가도 받고 있죠. 12 만나고 싶었습니다 + 인터뷰
경제살리기 법안, 민생법안, 이런 것들이 사실은 가장 우선적으로 처리되어야 할 법안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또 우선해서 처리하려고 하고요. 그런데 이런 법안들이 여야 정쟁으로 지연되는 것이 많이 아쉽지요. 안타깝기도 하고. 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영장재판이라는 것은 한 판사가 어제도 오늘도 내 일도 계속하고 있는 것인데, 정치권에서 어제 한 재판 을 가지고 비판을 하고 다툰다고 하면, 판사가 정치적 중립을 지키면서 독립적인 재판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런 것은 정치권에서 재판에 관여하는 격이 되는 거고, 사법독립이 침해될 수 있고, 정치적 중립이 위 태로워질 수 있다는 지적을 하는 것이죠. 이 지적은 법원을 위한 것도, 그 담당판사를 위한 것도 아니잖아 요. 정치권에서 구체적인 재판에 관여하는 간섭을 하 는 것은 국민의 권익을 위해 절대 옳은 일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사법부 독립과 정치적 중립은 국민을 위해 필요한 일 아닙니까. 국민을 위하고, 국익을 우선하기 위해서 는 재판에 대한 정치적 간섭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 제 소신입니다. 그런 소신에 대해 법원에 대해 무한 신뢰나 애정이 있어 그런다고 하는 건 잘못된 오해죠. 그런 관점에서 최근 법원 안으로 정치를 끌어들이 는 일들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정치를 끌어들인다 는 의미는 법원을 보수와 진보로 나눠 편을 나눈다는 뜻입니다. 진보적 성향의 판사들 의견이 더 많이 반영 되고, 사법행정에서도 그 사람들을 주요보직에 기용 을 하는데 그래선 안 되는 거죠. 법관대표회의라는 것도 저는 법원이 정치권 흉내를 내는 것이라고 보는데, 이는 「법원조직법」에 존재하지 않는 조직이에요. 「대법원규칙」으로 인위적으로 만든 단체인데, 「법원조직법」에서 위임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법적인 단체죠. 이런 법관대표회의의 결정 을 「법원조직법」에 규정된 대법관회의나 각급 판사회 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죠. 최근 정부에서 위원회 정치를 많이 하잖아요. 모든 부처에 위원회를 만드는데,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 이 그 구성원이 됩니다. 청와대도 국민청원 게시판을 만들어 운영을 하는데, 이것 역시 비법적인 거예요. 게 시판에 글 올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해관계인들 일 텐데, 그 사람들 이야기만 듣고 무슨 결정을 하겠 어요? 과연 그 결정이 올바른 결정이 될 수 있을까요? 13 법무사 2019년 1월호
사 등의 자격이 있는 분들이 소위에 참여하는 것에 대 해 의미가 있다고 봐요. 그런 분들이 법과 관련된 내 용과 핵심을 더 잘 알기 때문에 개혁을 이루어가는 데 더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특정직역에 유리한 위원들을 배제해야 한 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고, 법률전문가들이 참여해 개혁을 더 잘 이루어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에 도 일리가 있습니다. 업무 관행 있었다면, 존중돼야 옳은 것 Q. 이번에는 화제를 돌려 우리 법무사업계와 관련한 질문을 드릴까 합니다. 최근 개인회생파산 사건을 수 임한 법무사가 「변호사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지금 법무사업계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이번 사건뿐 아니라 최근 직역 간 충돌이 법조계의 큰 이슈가 되고 있는데, 현재 「법무사법」도 법사위에 계류 중인 상황에서 이에 대한 위원장님의 견해는 어 떠신지 듣고 싶습니다. 그동안의 업무 관행이 있었다면, 그 관행은 존중되 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사실상 해당 업무 를 수행해 왔다면 그것은 존중받아야 하고 평가 받 아 마땅하지요. 법조계에는 변호사도 있고 법무사도 있는데, 두 직 역이 지금까지 각자 존속되어 왔다면 각각의 시대적· 사회적 필요성이 그만큼 있었기 때문에 존속되어 왔 다고 볼 수 있겠죠. 그렇다면 서로가 상생하는 방향 이 옳은 것입니다. 만약 두 직역에 관련된 법안이 법사위에서 다뤄진 다면 저는 우선 양측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볼 것 같습 니다. 변호사측 의견과 법무사측 의견을 모두 많이 들 어본다면 충분히 결론이 내려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법사위 소위, 비법조인 구성도 일리 있는 주장 Q. 법사위에서 다루는 법안들을 구체적으로 심의하는 곳이 1, 2소위라고 알고 있습니다. 각 소위의 역할과 구 체적 운영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요? 법사위 제1소위는 법사위 소관의 고유 법안을 심의 하고, 제2소위는 타 상임위에서 통과된 법안의 체계 나 자구를 심사하죠. 특히 각 상임위에서 회부되어 전체회의에 상정된 법안 중 위헌 소지가 있거나 타 법률과 상충되는 경 우, 또 부처 간 협의가 미진한 부분이 있는 경우에 제 2소위로 법안이 넘어오는데, 제2소위에서는 그 법안 들에 대한 전체적인 체계와 자구에 대해 심도 깊은 심사를 합니다. 또, 법사위 전체회의에 상정된 법안들은 대체토론을 거친 후 법사위원들의 동의를 얻어서 원안 그대로나 아 니면 수정 의결되어 국회 본회의에 회부되고 있습니다. Q. 결국 법안 심사를 하는 1, 2소위가 이후 법안 통과 에 있어 큰 영향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법사위 구성 원에 변호사 출신이 너무 많아 특정 직역에 유리하다 는 지적이 있습니다. 변호사단체와 이해충돌이 될 수 있는 법안의 경우는 변호사가 아닌 위원들로 소위를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 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런 주장이 충분히 있을 수 있죠. 상식에 비춰볼 때는 그런 주장이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법사위원들의 여러 주장이나 의견들을 생각해 보면, 본인이 검찰 출신이라고 검찰 편을 든다거나, 법원 출 신이나 변호사라고 해서 법원이나 변호사업계 편을 든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정도의 균형감은 가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요. 저는 변호사 자격이 있거나 법무사나 회계사, 변리 14 만나고 싶었습니다 + 인터뷰
제가 판사로 있을 때도 늘 그런 태도를 견지했습니 다. 원고든 피고든, 검사든 피고인이든, 각자의 의견을 많이 들었고, 사건이 이해가 안 되면 판사실로 불러서 들었죠. 대학 때 읽은 법철학 책에 “판관은 많이 들어 야 한다. 그것도 양쪽 귀로 들어야 한다”는 격언이 있었 는데, 판사생활 동안 그 말을 새기면서 재판을 했어요. 지금 법사위원장을 하면서도 저는 이해가 상충되는 어떤 직역 간의 업무 범위에 대한 법안을 제·개정해야 한다고 하면, 양쪽 이야기를 충분히 들을 것 같습니다. 많이 듣다 보면 결론은 나게 되어 있거든요. 원칙적으로 저는 서민의 법률서비스 접근권을 최대 한 보장한다는 큰 틀에서 변호사업계와 법무사업계 가 직무범위에 대한 대화가 충분히 이루어져야 할 거 라고 봅니다. 여기에 각계 전문가들의 다양한 목소리 까지 녹여내 앞으로 법무사 여러분들의 역할이 올바 르게 정립될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 Q. 법사위원장으로서 남은 임기 동안 꼭 하고 싶은 일 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법원과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독립은 반드시 지켜 져야 해요. 남은 임기 동안 이 원칙을 지켜낼 수 있도 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생과 경제살리 기 법안을 최우선적으로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 최 선을 다하겠습니다. 더 자주 회의를 하고, 밤늦게까지 심사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하는 국회의 모습을 통 해 국민들이 신뢰할 수 있는 법사위를 만들고 싶어요.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Q. 마지막으로 2019년 새해를 맞이하여 법무사업계 에 덕담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급변하는 법률시장에서 국민과 가장 가까운 거리 에서 법률서비스를 제공해주고 계신 법무사 여러분 의 노고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대한민국 법무사 여러분의 역량은 감히 세계 최고 지금까지 변호사와 법무사 각각의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존속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서로가 상생하는 방향이 옳은 것입니다. 만약 두 직역에 관련된 법안이 법사위에서 다뤄진다면 저는 우선 양측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볼 것 같습니다. 많이 듣다 보면 결론이 내려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라고 자부합니다. 앞으로도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끊 임없는 자기개발을 통해 국민이 바라는 최고의 법률 서비스를 계속 제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법무사협회의 역랑 강화를 위한 제도 개선에 국회 차원의 지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 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법무사 가족 여러분들의 희망찬 내일을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15 법무사 2019년 1월호
대한민국 부동산시장의 결정적인 분기점, 1989년 ‘주택 200만 호 건설계획’과 부동산시장 안정화 하승주 동북아정치경제연구소장·작가 16 법으로 본 세상 + 쿼바디스, 대한민국 부동산
주택 200만 호, 단 4년 만에 공급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하나만 꼽는다면 언제가 될 것인가? 일제 해방 이후로 부동산과 관련된 수많은 사건들 이 있었다. 건국 초기의 토지분배도 있었고, 소작을 금지하는 헌법이 제정되기도 했고, ‘새마을운동’이라 는 이름으로 초가지붕을 다 뜯어내는 주택개량사업 이 벌어지기도 했고, 서울의 여의도와 강남이 개발 되기도 했다. 하나같이 국민의 주거생활 변화에 중요한 사건들이 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사건 단 하나를 꼽으 라면 1989년 발표된 “주택 200만 호 건설계획”을 꼽 고 싶다. 이 계획으로 말미암아 거의 전 국민의 주거 생활 자체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었으며, 이후 수십 년 간 부동산가격 안정화가 이루어져 경제성장의 토대가 되었다. 또, 국토이용의 중심축 자체도 바뀌게 되었다. 말 그대로 이 사업은 주택 200만 호를 단 5년 동안 에 공급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연간 40만 호씩 집을 지으면, 5년간 200만 호를 공급하게 된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엄청난 계획인지 감이 잘 잡히 지 않을 것이다. 1988년 기준으로 당시 전국의 총 주 택수는 667만 호에 불과했고, 서울시 전체 주택수는 123만 호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서울에 있는 총 주택 수의 2배를 단 5년 동안에 수도권을 중심으로 공급해 버리겠다는 계획이었다. 80년대 말, 3저 호황 등으로 실질소득이 증가하자 집값이 폭등한다. 정부는 ‘주택 200만 호 공급’을 발표하고, 4년 만에 분당·일산 등 5개 신도시를 건설한다. 이후 10년간 대한민국 부동산은 대안정기를 맞는다. 17 법무사 2019년 1월호
정책 초기에는 이게 말이 되느냐는 비판이 터져 나 왔다. 사업이 시작되면서는 전국의 건축자재가 품귀 현상을 빚으며 바닷모래를 썼다는 폭로가 이어졌고, 엄청난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건설경기는 과열을 빚는 한편으로 미분양이 속출하는 등 부작용도 쏟 아졌다. 그렇지만 이 계획은 결론적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 두었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건설 목표인 1992년을 1년이나 앞당긴 1991년에, 이미 대한민국은 그 계획을 초과 달성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정말로 서울을 둘러 싸고 분당, 일산, 중동, 평촌, 산본의 5개 신도시를 중 심으로 주택 200만 호 이상이 공급되었다. 이 정책이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정부의 각종 정책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정책으로 꼽히고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1989년의 결단이 있기 전까지 대한민국은 만성적인 주택의 절대부족에 시달렸다. 방 한 칸이라도 남으면 사글세로 내놓았고, 그 방에서 대식구가 불편을 감수하며 살아야 했다. 지금도 50대 이상의 국민들이라면 누구나 단칸 셋방의 기억 한 자락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만성적 주택부족, 3저 호황으로 ‘집값폭등’ 낳아 ‘주택 200만 호 건설계획’의 성공은 대한민국 국민 이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를 바꾸었다. 1980년대 이 전을 다룬 TV 드라마를 떠올려 본다면, 어떤 전형적 인 모습이 연상될 것이다. 수도가 있는 작은 마당이 있고, 이를 둘러싸고 셋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으며, 주인아주머니가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면서 복작복작 살아가는 모습이다. 드라마 속의 사람들은 독립된 주택에서 따로 사는 것이 아니었다. 한 주택의 방 하나하나마다 한 가구씩 세 들어 사는 것이다. 바로 ‘단칸 셋방’이다. 1987년 말 전국의 주택보급률은 70.6%였다. 서울 은 56.2%에 불과했다. 주택보급률이란 가구수에 비 하여 주택이 얼마나 있는가를 나타내는 수이기 때문 에, 통계로만 보더라도 서울에 사는 가구의 절반은 무조건 집이 없다는 말이 된다. 그게 자기 집이건 전 월세로 살건 간에 그 절반의 가구는 한 채의 집에 딸 린 단칸 셋방에 거주해 살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드 라마 속의 상황은 너무나 평범한 대한민국 가구의 일 상이었던 것이다. 1989년의 결단이 있기 전까지 대한민국 정부는 국 민의 주거생활을 책임지는 주체가 전혀 아니었다. 국 가의 모든 자원은 기업의 생산 활동을 위해 쓰여야 했고, 국민들이 어떤 집에 사는가는 아무런 고려대상 이 되지 못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동안 대한민국 GDP의 단 3%만이 주거생활을 위해 쓰였을 뿐이다(최근에는 연 간 GDP의 12% 이상이 주거를 위해 쓰인다). 국가가 주도하는 부동산 사업이란 그저 기업의 공장 부지를 만들어 주는 것이 전부였다. 국민들이 어떤 집에 사는 가의 문제는 수출로 돈 버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 으니 국가가 관여할 일이 없었다. 대한민국은 만성적인 주택의 절대부족에 시달렸 18 법으로 본 세상 + 쿼바디스, 대한민국 부동산
다. 집 한 채라도 쪼개서 나누어 써야만 했다. 그러니 방 한 칸이라도 남으면 사글세로 내놓았고, 그 방에 서 대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 많은 불편을 감수 하면서 살아야 했던 것이다. 지금도 50대 이상의 국 민들이라면 누구나 단칸 셋방의 기억 한 자락은 가지 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1980년대 말, 3저 호황이 일어나면서 연 간 경제성장률이 10%대를 훌쩍 넘어섰다. 1987년 노 동자 대투쟁 이후에는 노동자의 실질임금도 대폭 상 승했다. 수중에 돈이 생긴 국민들이 가장 절실하게 필 요했던 상품은 다른 무엇보다 ‘멀쩡한 집 한 채’였다. 강남지역 아파트 4개월 만에 26% 오르기도 당시의 폭발적인 주택 수요에 비해 대한민국의 집 은 절대부족 상태에 있었으니 당연히 집값이 수직으 로 치솟았다. 당시의 신문기사를 보면 1989년 1월부터 4월까지 단 4개월 만에 강남지역 아파트 가격이 26% 상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85년을 기준으로 하면 전국의 지가 수준은 1989 년에 무려 2.5배가 상승했다. 일본의 버블과 비교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에도 엄청난 부동산 가격상승이 이루어지던 참이었다. 집값만 오르는 것 이 아니라 전월세도 따라서 치솟았다. 거리로 나앉게 된 서민들은 살길이 막막해지자 일 가족이 자살하는 등 연일 관련 사건들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다. 그야말로 살인적인 집값 폭등이라는 말 이 실감나는 상황이었다. 국민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 에 다다랐다. 이러다 자칫 정권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는 위기 에 처한 노태우 정부는 부동산가격 안정을 위해 필사 1991년, 노태우 정부의 주택 200만 호 공급 정책에 따라 서울 주변의 분당, 일산, 중동, 평촌, 산본의 5개 신도시가 개발되었다. 사진은 1994.4.1. 일산 신도시 개발 붐을 타고 일산 지역 주택 신축지대 내 건설 중인 다세대 단독 주택들. <사진 : 연합뉴스> 19 법무사 2019년 1월호
대한민국 부동산은 2005년 ‘8·31 대책’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참여정부의 부동 산 안정책으로 ‘거래질서 확립’이라는 측면에서 또 한 번의 분기점을 이룬다. 사 진은 2006년 논현동 건설회관에서 열린 ‘8.31 부동산대책 후 1년-평가와 개선 방안 세미나’ 모습. <사진 : 연합뉴스> 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모든 정책 을 쏟아내며 집값 잡기에 올인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 로 ‘토지 공개념’이다. 「택지소유에 대한 법률」, 「토지 초과이득세법」, 「개발이익환수에 관한 법률」이 잇따 라 제정되면서 보수주의 정권인 노태우 정부는 “사회 주의 하자는 거냐”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이런 제 도적 안정책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정책이었던 ‘주택 200만 호 공급정책’도 발표되었던 것이다. 주택 200만 호 공급 후, 집값상승률 0% 주택 200만 호의 공급은 대한민국의 풍경을 극적 으로 바꾸어 놓았다. 서울 주변의 위성도시들은 아파 트로 빽빽하게 채워지면서, 주택보급률을 70%대에 서 100%대로 바꾸어 놓았다. 지금도 여전히 주택공 급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1980년대와 같은 극 단적인 공급부족 사태와는 비교할 수 없다. 이제 중 산층들의 주된 주거 형태는 단칸 셋방이 아니라, 아 파트가 되었다. TV드라마에서도 단칸 셋방을 보기 는 힘들어졌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부동산 가격의 장기안정 추세가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지금도 툭하면 ‘아파트 값 폭등’이라는 제목이 단골로 신문지상에 오르내리지 만, 과거 1980년대 이전의 수준과는 비교 자체를 불허 한다. 지금은 연간 기준으로 5%만 올라도 폭등이라고 난리가 나지만, 과거에는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더라도 연간 20%대 이상의 상승이 툭하면 일어나곤 했었다. 일 년 만에 집값이 2~3배씩 치솟아 오르던 시절이었다. 1991년부터 200만 호 건설계획에 의해 지어진 집 들이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 고통스럽던 집값 폭등이 사라졌다. 이후로 집값은 명 목상으로 1997년까지 거의 0%대의 상승률을 유지한 다. 물가상승률을 고려한다면 실질가격은 7~8년 동안 1991년부터 지어진 집들이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집값 폭등이 사라졌다. 이후로 집값은 명목상으로 1997년까지 거의 0%대의 상승률을 유지한다. 주택 200만 호 계획의 조기달성 후에도 꾸준히 40~50만 채씩 공급이 유지된 덕분이었다. 20 법으로 본 세상 + 쿼바디스, 대한민국 부동산
당시 정부가 했던 일은 주택을 직접 짓는 것이 아니 라, ‘택지’를 신도시 형태로 공급하는 일이었다. 즉, 부 지를 정리하고, 전기와 수도를 끌어오고, 도로와 전철 로 교통망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런 기반시설의 정 비가 없는 상태에서의 주택공급이라면, 국민의 주택 수요를 채울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주택가격은 계 속 치솟아 올랐을 것이라는 예상이 충분히 가능하다. 부동산 급등은 가계생활을 망가뜨리는 것만이 아 니라, 기업의 생산 활동에도 당연히 치명적인 부작용 을 안긴다. 당장 공장부지 등의 부동산 비용이 늘어나 는 것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강력한 임금인상 압박 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 월급 받아서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기업들로서는 생산 활동보다 부동산 투자가 훨씬 수익률이 나오는 상황이 된다면 당연히 생산 활동을 포기하는 선택을 하게 될 것이고, 이는 국가의 성장 동력을 좀먹는 치명적인 요인이 된다. 1990년대 초반에 이루어진 주택의 공급 충격은 이 후로도 거의 10여 년간 이어지면서 대한민국 부동산 의 대안정기를 이루었고, 이후 2000년대 중반의 글로 벌 유동성 대폭발기에서야 비로소 효력이 끝나게 된다. 이후 대한민국 부동산은 2005년 ‘8·31 대책’이라 는 이름으로 나온 참여정부의 부동산 안정책으로 또 한 번 분기점을 맞게 된다. 주택 200만 호 대책이 ‘공 급 확대’라는 이름의 첫 분기점이었다면, 8·31 대책 은 ‘거래질서 확립’이라는 측면에서 또 한 번의 분기 점을 이룬다. 그러나 시장에 미친 충격의 크기나 경제 전반에 미 친 영향을 생각해 본다면, 주택 200만 호 건설계획 을 뛰어넘는 정책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이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다시는 과거 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과거의 그 풍경은 무 척 남루했다.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이니 참으로 다행이다. 거의 30% 이상 내린 셈이다. 주택 200만 호 계획을 조기 달성한 이후에도 꾸준히 40~50만 채씩 공급이 유지된 덕분이었다. 당시 주택공급을 위해 건설경기는 늘 최고의 호황 이었고, 건설노동자들의 임금은 2~3배씩 치솟았다. 당 시 건설현장의 비숙련 노동자의 하루 일당은 공식처 럼 5만 원이었다. 1990년 사립대학의 1학기 등록금이 80만 원이었으니, 건설현장에서 한 달만 일하면 대학 생들은 등록금을 다 마련하고 생활비까지 벌 수 있었 던 시절이었다. 당시 대학생들의 아르바이트는 과외보 다는 소위 ‘노가다’가 더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건설현장의 임금인상은 공장 노동자들의 대거 이탈을 불러왔다. 연쇄적으로 제조업 근로자의 임금도 인상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희망적이었던 시기로 1990년대 초반을 꼽 는 경우가 많은 이유는, 한편으로 주택 200만 호 건설 계획이 가져온 임금인상의 결과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흥겨운 분위기는 1997년 외환위기로 박 살이 나버리지만, 이는 훗날의 이야기이다. 노태우 정부의 공급확대 정책, 전무후무한 성공 당시 노태우 정부가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해 본다. 주택가격이 급속히 오르고 있으니, 당연히 공급도 엄청나게 활발히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았 다면, 공급물량은 대부분 소위 ‘집장사’를 통해 이루 어졌을 것이다. 집장사들이 급한 수요에 맞춰 더 급하게 날림으로 주택공급을 함으로써 전국 곳곳에서 난개발 사태가 일어났을 것이다. 정부가 직접 나서서 개발을 진행했 더라도 일부 지역의 난개발은 심각한 수준이었으니,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다. 21 법무사 2019년 1월호
피해자 11만 명, 2조 원대 천문학적 사기 주수도가 돌아온다 제이유네트워크 다단계판매 사기사건… 더 이상의 피해자는 없을까? 정락인 사건사고 전문기자 22 법으로 본 세상 + 사건 그 이후
신종 다단계기법의 창안 주수도는 1956년 11월, 울산에서 염전 집 2남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독학 으로 검정고시를 통과해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서 울로 올라온 그는 영어 고액과외로 돈을 벌었다. 입소 문이 나자 1970년대 말부터 학원가로 진출했고, ‘영어 강사’로 유명세를 떨쳤다. 1980년대 초에는 서울 강 남에 직접 학원을 설립해 학원 경영에 나서기도 했다. 1987년에는 신민주공화당에 들어가 정치인으로 변 신을 꾀했으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주수도가 다단 계 판매업에 눈을 뜬 것은 1990년대 중반이다. 당시 유명 다단계판매 업체였던 숭민그룹(SMK)의 사업자 로 발을 디디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이후 독자적으로 ‘일영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를 설립해 사업자를 끌어모았다. 그의 다단계판매 방식은 겉으로는 사업자에게 ‘꿈 같은 환상’을 심어주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사막의 신 기루였다. 1999년 주 씨는 사기혐의로 구속된다. 이후 업체 이름을 ‘주코’로 변경했으나 2002년 다시 같은 혐의로 구속된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그는 같은 해 상호를 ‘제이유네 트워크’로 변경하고, ‘소비생활 공유마케팅’이라는 새 로운 다단계 기법을 창안한다. 물건을 많이 사면 수당 을 더 많이 받아간다는 일종의 ‘돈 놓고 돈 먹기식’ 기 법이었다. 제이유는 이 신종 기법으로 투자자들에게 고액의 배당을 약속했다. 예를 들어 100원어치 물건 을 구매하면 적립포인트 50%를 부여해 250원을 돌 려주는 방식이다. 이 말을 믿은 사람들이 벌 떼처럼 몰려들었다. 주수 도는 자신의 공유마케팅을 기존의 피라미드와는 차 원이 다른 ‘신개념 마케팅’이라고 소개했다. 사는 사 람이나 파는 사람 모두 만족하는 방식이라며 대대적 인 홍보전을 펼쳤다. 정치인·연예인 얼굴마담 미끼로 사업자 끌어들여 달변가였던 주수도는 자신의 장점을 십분 활용했 다. 그는 매일 아침 화상강의를 통해 전국의 사업자들 에게 소비를 독려했고, 지역 특산물을 사주겠다는 미 끼를 던지며 지자체에도 접근했다. 민선 단체장들은 제이유의 회원수에 놀라며 제이유 본사에 마련된 연 출 테이블에서 주수도와 손을 맞잡고 사진을 찍었다. ‘단군 이래 최대의 사기사건’이라 불리는 일명 ‘조희팔 사건’. 그러나 조희팔 이전 ‘최대의 사기꾼’은 제이유그룹 회장 주수도(62)였다. 100억 원대 비자금을 조성해 정·관·언론계 인사들을 매수하고, 그들을 방패삼아 문어발식 사업 확장으로 11만 명의 피해자를 양산한 주수도. 감옥에서도 다단계 업체를 경영해 온 것으로 드러났던 주 씨가 12년형을 마치고 곧 출소한다. 그는 과연 죗값을 다한 것인가. 23 법무사 2019년 1월호
제이유는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 유명 인사들을 얼 굴 마담으로 삼았다. 2004년 5월에는 언론계, 학계, 법조계, 정계, 재계 출신 인사 45명으로 구성된 ‘자문 위원단’을 출범시켰다. 자문위원단은 1년 뒤에는 62명으로 늘어난다. 여기 에는 전직 판사, 전직 군 장성, 전직 국정원 간부, 전직 경찰 간부, 전직 고위직 교육공무원, 현직 언론사 간 부, 인기 연예인 등이 참여했다. 자문위원 중 전직 인사들은 공개적으로 제이유의 공유마케팅과 주수도를 극찬하는 홍보대사로 활동했 고, 현직 고위층 인사들은 신분을 감추고 ‘제이유 전 도사’, ‘제이유 방패막이’가 됐다. 이들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주수도 사람’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돈’과 ‘조직’ 때문이 었다. 전직 국회의원들은 재기하기 위해 돈과 조직이 반드시 필요했다. 수십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제이유가 내민 손을 뿌 리치기란 쉽지 않았다. 여기에 얼굴만 내밀고도 엄청 난 돈을 챙길 수 있다는 유혹도 있었다. 전직 정치인 들에게 제이유는 꿩 먹고 알 먹으면서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최고의 안식처였던 것이다. 실제 제이유는 얼굴마담을 대가로 막대한 돈을 벌 게 해줬다. 개미 사업자들에게 약속한 후원수당은 주 지 않아도 자문위원 수당은 꼭꼭 챙겨줬다. 이들은 통장 잔고를 확인할 때마다 “제이유는 황금알을 낳 는 거위”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제이유 와 주수도에 대한 충성도를 높여갔다. 제이유는 틈나는 대로 이들을 앞세웠다. 각종 행 사에 연사로 내보냈으며, 사내방송, 사보, 소식지 등 에 홍보도구로 이용했다. 제이유의 리더 사업자들은 이런 홍보도구를 미끼로 사업자들을 끌어들였다. 얼 굴마담이 필요했던 제이유와 조직과 돈이 필요했던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궁합이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언론도 춤을 췄다. 제이유와 특수관계에 있었던 언 론사들은 ‘최고’, ‘최다’, ‘혁명’, ‘기적’ 같은 화려한 수 식어를 사용하며 주수도와 제이유의 공유마케팅을 극찬하고, ‘제휴’, ‘공동캠페인’, ‘토종업체 살리기’ 등 의 명목으로 돈을 받았다. 국내 굴지의 한 언론사는 제이유의 돈으로 경제 월 간지를 창간했다. 제이유에 회사의 지분 일부를 판 언 론사도 있었다. 몇몇 언론사는 제이유의 부정을 눈감 아주고 광고를 받거나 더 큰 대가를 챙긴 것으로 알 려졌다. 문어발 사업 확장에 2004년, 재무상태 위험 신호 이런 제이유의 홍보 마케팅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 을 거뒀다. 수많은 개미사업자들이 언론보도를 믿고 제이유에 돈을 투자했기 때문이다. 전방위 물량 공세 에 힘입어 제이유는 다단계판매업계 부동의 1위인 암 웨이를 제쳤다. 2004년 매출이 1조 5천억 원에 육박하면서 ‘매출 1 위’에 올라섰다. 언론에서도 주수도가 성공신화를 이 룬 것처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성공신화를 바탕으로 제이유는 문어발식으로 사업 을 확장했다. 문을 닫을 때까지 계열사가 20여 개에 달했다. 유통업에 진출해 ‘제이유백화점’을 개장했고, ‘제이유마트’를 브랜드로 슈퍼마켓 체인사업에도 나 섰다. 식기제조업체인 ‘세신’의 지분을 확보한 후 이 기업을 통해 석유시추사업을 하는 ‘지구지질정보’에 투자했다. 성체줄기세포를 연구하는 ‘한성에코넷’, 보험판매 를 하는 ‘포라리스’, 온오프라인 교육기관 ‘한샘닷컴’, 골프와 콘도 등을 거래하는 ‘알바21회원권거래소’, 나 노기술 상품 개발업체인 ‘넵클러스터’, 택배업체인 ‘주코택배’, 고급 인력·사외이사 알선업체 ‘유니맥코리 아’ 등도 운영했다. 24 법으로 본 세상 + 사건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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