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초기에는 이게 말이 되느냐는 비판이 터져 나 왔다. 사업이 시작되면서는 전국의 건축자재가 품귀 현상을 빚으며 바닷모래를 썼다는 폭로가 이어졌고, 엄청난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건설경기는 과열을 빚는 한편으로 미분양이 속출하는 등 부작용도 쏟 아졌다. 그렇지만 이 계획은 결론적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 두었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건설 목표인 1992년을 1년이나 앞당긴 1991년에, 이미 대한민국은 그 계획을 초과 달성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정말로 서울을 둘러 싸고 분당, 일산, 중동, 평촌, 산본의 5개 신도시를 중 심으로 주택 200만 호 이상이 공급되었다. 이 정책이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정부의 각종 정책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정책으로 꼽히고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1989년의 결단이 있기 전까지 대한민국은 만성적인 주택의 절대부족에 시달렸다. 방 한 칸이라도 남으면 사글세로 내놓았고, 그 방에서 대식구가 불편을 감수하며 살아야 했다. 지금도 50대 이상의 국민들이라면 누구나 단칸 셋방의 기억 한 자락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만성적 주택부족, 3저 호황으로 ‘집값폭등’ 낳아 ‘주택 200만 호 건설계획’의 성공은 대한민국 국민 이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를 바꾸었다. 1980년대 이 전을 다룬 TV 드라마를 떠올려 본다면, 어떤 전형적 인 모습이 연상될 것이다. 수도가 있는 작은 마당이 있고, 이를 둘러싸고 셋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으며, 주인아주머니가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면서 복작복작 살아가는 모습이다. 드라마 속의 사람들은 독립된 주택에서 따로 사는 것이 아니었다. 한 주택의 방 하나하나마다 한 가구씩 세 들어 사는 것이다. 바로 ‘단칸 셋방’이다. 1987년 말 전국의 주택보급률은 70.6%였다. 서울 은 56.2%에 불과했다. 주택보급률이란 가구수에 비 하여 주택이 얼마나 있는가를 나타내는 수이기 때문 에, 통계로만 보더라도 서울에 사는 가구의 절반은 무조건 집이 없다는 말이 된다. 그게 자기 집이건 전 월세로 살건 간에 그 절반의 가구는 한 채의 집에 딸 린 단칸 셋방에 거주해 살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드 라마 속의 상황은 너무나 평범한 대한민국 가구의 일 상이었던 것이다. 1989년의 결단이 있기 전까지 대한민국 정부는 국 민의 주거생활을 책임지는 주체가 전혀 아니었다. 국 가의 모든 자원은 기업의 생산 활동을 위해 쓰여야 했고, 국민들이 어떤 집에 사는가는 아무런 고려대상 이 되지 못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동안 대한민국 GDP의 단 3%만이 주거생활을 위해 쓰였을 뿐이다(최근에는 연 간 GDP의 12% 이상이 주거를 위해 쓰인다). 국가가 주도하는 부동산 사업이란 그저 기업의 공장 부지를 만들어 주는 것이 전부였다. 국민들이 어떤 집에 사는 가의 문제는 수출로 돈 버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 으니 국가가 관여할 일이 없었다. 대한민국은 만성적인 주택의 절대부족에 시달렸 18 법으로 본 세상 + 쿼바디스, 대한민국 부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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