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정부가 했던 일은 주택을 직접 짓는 것이 아니 라, ‘택지’를 신도시 형태로 공급하는 일이었다. 즉, 부 지를 정리하고, 전기와 수도를 끌어오고, 도로와 전철 로 교통망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런 기반시설의 정 비가 없는 상태에서의 주택공급이라면, 국민의 주택 수요를 채울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주택가격은 계 속 치솟아 올랐을 것이라는 예상이 충분히 가능하다. 부동산 급등은 가계생활을 망가뜨리는 것만이 아 니라, 기업의 생산 활동에도 당연히 치명적인 부작용 을 안긴다. 당장 공장부지 등의 부동산 비용이 늘어나 는 것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강력한 임금인상 압박 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 월급 받아서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기업들로서는 생산 활동보다 부동산 투자가 훨씬 수익률이 나오는 상황이 된다면 당연히 생산 활동을 포기하는 선택을 하게 될 것이고, 이는 국가의 성장 동력을 좀먹는 치명적인 요인이 된다. 1990년대 초반에 이루어진 주택의 공급 충격은 이 후로도 거의 10여 년간 이어지면서 대한민국 부동산 의 대안정기를 이루었고, 이후 2000년대 중반의 글로 벌 유동성 대폭발기에서야 비로소 효력이 끝나게 된다. 이후 대한민국 부동산은 2005년 ‘8·31 대책’이라 는 이름으로 나온 참여정부의 부동산 안정책으로 또 한 번 분기점을 맞게 된다. 주택 200만 호 대책이 ‘공 급 확대’라는 이름의 첫 분기점이었다면, 8·31 대책 은 ‘거래질서 확립’이라는 측면에서 또 한 번의 분기 점을 이룬다. 그러나 시장에 미친 충격의 크기나 경제 전반에 미 친 영향을 생각해 본다면, 주택 200만 호 건설계획 을 뛰어넘는 정책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이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다시는 과거 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과거의 그 풍경은 무 척 남루했다.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이니 참으로 다행이다. 거의 30% 이상 내린 셈이다. 주택 200만 호 계획을 조기 달성한 이후에도 꾸준히 40~50만 채씩 공급이 유지된 덕분이었다. 당시 주택공급을 위해 건설경기는 늘 최고의 호황 이었고, 건설노동자들의 임금은 2~3배씩 치솟았다. 당 시 건설현장의 비숙련 노동자의 하루 일당은 공식처 럼 5만 원이었다. 1990년 사립대학의 1학기 등록금이 80만 원이었으니, 건설현장에서 한 달만 일하면 대학 생들은 등록금을 다 마련하고 생활비까지 벌 수 있었 던 시절이었다. 당시 대학생들의 아르바이트는 과외보 다는 소위 ‘노가다’가 더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건설현장의 임금인상은 공장 노동자들의 대거 이탈을 불러왔다. 연쇄적으로 제조업 근로자의 임금도 인상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희망적이었던 시기로 1990년대 초반을 꼽 는 경우가 많은 이유는, 한편으로 주택 200만 호 건설 계획이 가져온 임금인상의 결과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흥겨운 분위기는 1997년 외환위기로 박 살이 나버리지만, 이는 훗날의 이야기이다. 노태우 정부의 공급확대 정책, 전무후무한 성공 당시 노태우 정부가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해 본다. 주택가격이 급속히 오르고 있으니, 당연히 공급도 엄청나게 활발히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았 다면, 공급물량은 대부분 소위 ‘집장사’를 통해 이루 어졌을 것이다. 집장사들이 급한 수요에 맞춰 더 급하게 날림으로 주택공급을 함으로써 전국 곳곳에서 난개발 사태가 일어났을 것이다. 정부가 직접 나서서 개발을 진행했 더라도 일부 지역의 난개발은 심각한 수준이었으니,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다. 21 법무사 2019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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