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법무사 5월호

괭이만 사용해 팠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차 출되었을지 짐작이 가능하다. 이곳 입구의 계단을 105단, 30m 정도를 내려가면 종횡으로개미굴처럼뻗어있는내부구조가이어지는 데, 거기에는 막료실, 사령관실, 의료실, 하사관 병원 실(兵員室) 등이 있다. 사령관실의 벽면에는 “천황의 깃발 아래 죽는 것이야말로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는 것”이라는 당시 해군사령관 오타 미노루 소장 의 「애창가」가새겨져지금까지도선명하게남아있다. 1945년 6월 13일 밤, 해군사령부호로 퇴각한 군인 들은 미군의 맹격에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한 오타 소장의 명령에 따라 전원이 수류탄(grenade)을 터뜨려 집단자살 한다. 당시 오키나와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오타 소장이 자살 직전 남긴 글에서도 확인된다. “현민은 청년이나 장년 할 것 없이 모두 방위에 동 원이되었으며, …젊은여성은자발적으로군에몸을 던져 간호부, 취사부는 말할 것도 없고, 포탄을 옮기 거나 선발대 참가를 신청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1945.6.13.자 『뉴욕타임』지에서도 당시 상황에 대 해 “The people who commited suicide in the Navy underground Headquarter, along with Road Adam, Ota on June 13.(6월 13일 오타로드 아 담과 함께 해군 지하본부에서 자살한 사람들)”이라 는 제하의 기사로 보도한 바 있다. 영국수상처칠의오키나와전투회고 해군사령부호의 집단자살 이후 일본군의 남은 병 력은 미군의 화력에 의해 붕괴되었다. 6.19.에는 일본 군사령부참모가전사했고, 6.23. 오키나와방어진지 구축을 위해 파견되었던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과 조 이사무 소장이 할복자살을 함으로써 마침내 오키나 와 전투는 종결되었다. 그러나 비극은 군인들의 죽음이 아니었다. 일본군 은 군인뿐 아니라 오키나와 현민들까지 할복자살을 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수많은 현민들이 수류탄으로 자폭하거나 가족끼리 서로 목을 졸라 죽이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때 사망한 민간인의 수는 12만 명으로 추산되는 데, 밤이 되면 도처에 널린 시체를 피해가기 위해 지 팡이를 짚고 다녔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미군의 무 자비한 괴멸작전과 일본군의 가미카제(자살공격)식 전술, 강요된 집단자결(옥쇄)로 인해 무고한 민간인이 대량 학살된 것이다. 당시 영국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 chill)의 회고록 『제2차세계대전(the 2nd World War)』 제8권 ‘일본의 패배’란 장(章)에는 당시 오키나와 전 투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일본군의) 자폭기에 의한 공격은 경이적인 전적 을 나타내기에 이르렀다. 오키나와가 정복되기 전에 1900대 이상의 비행기가 자폭했다. 킹 제독에 의하 면, 34척의 구축함과 소 항공모함이 격침되고, 약 200척의 다른 함선이 파괴되었다. 이와 같은 공격과 수 천 번에 걸친 일반적인 돌격 이 일찍이 일본군이 감행했던 가장 치열한 공격을 이 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철회되었다. 6월 22 일, 3개월 가까운 전투 끝에 이 섬은 굴복하고 말았 다. 이 전투는 45만 명의 육군을 포함하는 니미츠 제 독의 중부태평양군의 전력을 다한 전투의 빛나는 승 리였다.” 1945.8.6. 히로시마에 최초의 원자탄이 투하되었 고, 동년 8.9.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투하되었다. 전쟁 의 종식을 알리는 작전이었다. 일본군은 무조건 항복 을 선언한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한국은 일본의 지배에서 벗 어나 해방을 맞았다. 81 법무사 2019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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